"법에는 사문화된 조항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로 인해 불필요하게 처벌받거나, 변호사를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내와 헌법소원을 청구한 이유기도 합니다."
지난 달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32주 전 태아 성감별 금지 법'.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을 이끈 중심에는 젊은 부부 변호사가 있었다. 황용(40) 법무법인 상림 변호사(40)와 같은 로펌에 몸 담고 있는 아내 정소영(36) 변호사다. 정 변호사는 지난해 출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편에게 먼저 헌법소원 청구를 제안했다. 성별을 모르니 태어날 아이의 옷과 용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불편함이 뒤따랐다. 부부는 지난해 11월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이전 사건과 함께 병합해 판결을 내렸다. 정 변호사는 지난달 말 첫 자녀인 딸을 출산하면서 남편과 함께 헌재에서 결정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산후조리원에서 판결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기뻐했다.
정 변호사는 "태어날 아이에 대한 성별을 알고자 하는 것은 부모의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마음"이라며 "앞으로 임산부들이 출산 전 태아 성별을 알고 아이를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돼 기쁘다"고 소회를 밝혔다.
황 변호사는 헌재 결정 이튿날인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부모라면 당연히 태아 성별을 알고 싶어할 수밖에 없는데 법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변호사가 아니면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태아 성별 고지 금지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를 하려면 출산 시기에 있는 당사자 자격도 갖춰야 하기 때문에 당사자이자 변호사로서 사문화 조항을 바꾸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지난 달 28일 헌법재판소는 32주 전 태아 성별을 고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의료법 20조 2항에 대해 재판관 6대3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지난 2008년 임신 기간 내내 성별 고지를 금지한 의료법 조항이 헌법에 맞지 않는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이듬해 임신 32주가 지나면 성별을 고지할 수 있도록 대체 법안이 입법됐다. 하지만 입법 이후에도 해당 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됐다.
황 변호사는 "최근 저출생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성별 고지와 태아 생명 보호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높지 않다"며 "낙태율을 고려하더라도 10주 이전에 거의 낙태를 결정을 하고 있고, 낙태 결정 당시 성별이 고려되었는가를 보더라도 남아 선호 사상이 사라지면서 사실상 유의미하게 태아 성별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부모이기 전에 변호사로서도 사문화된 조항을 바꾸는 데 책임감을 느꼈다. 황 변호사는 "10여년간 태아 성감별 법으로 처벌받은 사람이 없다면 법이 아닌 ‘실효적 규정’이 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며 "해당 금지법이 법률로서 계속 남을 경우 공소장 요건 사실에는 해당되기 때문에 차후에 이로 인해 불필요하게 처벌받는 사례가 생길 수도 있어 빠른 개정안과 의안이 발의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남아 선호 사상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태아 성 감별법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태아 생명 보호에 대한 우려도 만만찮다. 이와 관련해 황 변호사는 기본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사문화 조항이 사라지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에 법 개정과 관련 입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황 변호사는 “헌법재판소를 통해서만 법 개정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며 "국회가 선제적으로 법에 대한 필요성을 검토하고, 사문화 조항이 법적으로 그 효력을 상실하는 경우엔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입법도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태아 성별 고지 금지 법안의 효력 상실을 계기로 낙태죄와 관련한 입법 역시 빠르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후 관련 법안이 2020년 12월 31일까지 개정되지 않으면서, 해당 조항은 사실상 효력을 잃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법 개정 조항이 나오지 않아 여전히 낙태는 불법도 아니지만, 합법도 아닌 사실상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상황이다.
황 변호사는 "낙태죄 관련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지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임신 14주, 24주 등을 놓고 낙태 허용 기준 관련 입법은 제자리 걸음"이라며 “법 공백이 길어지다보니 낙태 시술이 음성화될 위험도 점차 커지고 있다”며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경우 등을 고려해 사회적 필요성에 따라 낙태 허용 기준에 관한 개정이라도 조속히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