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물가 안정에 대한 우려 등으로 통화 긴축 기조를 충분히 장기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섣부른 피벗(통화정책 기조 전환)이 부채 증가 등 금융 불안을 불러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주택담보대출 증가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주택 가격 하락으로 ‘영끌족’ 등 취약차주의 신용 위험이 확대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내놓았다.
한은은 14일 발표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서 “물가가 목표 수준(2%)으로 안정될 것으로 확신하기는 아직 이르다”며 “물가 안정기로 재진입하는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리스크가 여전하다”고 평가했다. 물가 불안을 키우는 대외 요인으로는 중동 불안 등 지정학적 위험을 꼽았다. 실제 러시아 정유 시설의 피습 소식에 브렌트유는 전날 배럴당 84.03달러까지 올라 4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대내적으로는 불안정한 물가 기대 심리를 우려했다. 지난달 조사 결과에 따르면 향후 1년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3%로 안정될 것이라고 응답한 비중은 41.3%에 불과했다. 2021년에는 연간 내내 이 비중이 50%대를 나타냈다. 이런 상황에서 신중하지 못한 피벗은 금융시장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한은은 “섣부른 긴축 기조 선회가 정책에 대한 신뢰를 저해할 수 있다”며 “또 금융시장에 부채 증가 및 위험 쏠림의 시그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경기에 대한 경고음도 한층 키웠다. 부동산 경기 부진이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로 이어져 금융기관의 자산 건전성과 유동성을 저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건설·부동산 기업의 비은행권 기업대출 연체율이 2022년 3분기 1.6%에서 지난해 3분기 4.2%까지 오르는 등 불안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또 집값 하락은 가계의 대출 상환 부담으로 이어져 신용 위험을 확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은은 “한국은 가계의 자금 조달이 주로 부동산 담보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며 “이를 고려하면 주택 가격 하락은 상환 능력이 충분하지 않은 주담대 차주 등을 중심으로 신용 위험을 확대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은의 경고대로 주담대 증가세는 여전히 약화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월평균 주택 매매 거래량은 4만 2000가구로 과거(2010~2022년) 평균인 6만 7000가구 대비 약 37% 줄었다. 하지만 지난해 월평균 주택담보대출 증가 폭은 3조 9000억 원으로 과거 평균과 같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피벗과 관련해서는 한국의 물가와 부채를 다시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한은은 “미국 통화정책의 전환이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디스인플레이션(물가 상승률 둔화) 및 디레버리징(부채 감축)을 저해할 가능성에 유의해야 한다”며 “최근 자산 가격 급등을 경험했던 경제주체들이 물가 및 자산 가격 상승 기대를 재형성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또 미국 상업용 부동산 리스크와 관련해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나 지난해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때와 비교하면 부실 규모가 크지 않아 시스템 리스크로 확대될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