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저물고 신보호주의 기조가 확산하면서 기술·인력 쟁탈전이 격화하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과 우수 인력은 중국 같은 후발 주자뿐만 아니라 동맹국인 미국도 탐을 내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연합(EU)도 제조업 리쇼어링 정책과 함께 경쟁적으로 자국 산업 육성책을 쏟아내는 중이다.
해외 업체들의 국내 시장 공략도 거세지고 있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 같은 중국 플랫폼 업체들은 한국 시장에 경쟁적으로 뛰어들면서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저가를 무기로 한 물량 공세에 국가 경제의 핏줄과 같은 유통망을 내어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14일 국가정보원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9~2023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종에서 산업기술 해외 유출이 적발된 건수는 각각 38건과 16건에 이른다. 이들 두 업종만 54건으로 총 96건의 56%에 달한다. 특히 반도체 산업기술 해외 유출 적발 건수를 연도별로 보면 2019년 3건에 그쳤으나 지난해에는 15건으로 대폭 늘어났다.
이미 글로벌 기술·무역 시장은 전쟁터가 된 지 오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글로벌 기술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중국에 25%의 보복 관세를 부과한 게 신호탄이 됐다.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거치면서 백신과 무기 등 기술 자립의 중요성은 각국의 보호주의에 불을 붙였다. 신보호주의는 적과 아군 구별이 모호하다. 유럽은 이달 6일 전면 시행한 디지털시장법을 통해 미국의 애플과 구글, 중국의 바이트댄스(틱톡) 등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을 모두 겨냥하고 있다.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보조금과 수출통제 등 당근과 채찍을 양손에 쥐고 흔들고 있다. 미국 반도체법은 미국에서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에 반도체 보조금(390억 달러·약 51조 3600억 원)과 연구개발 지원금(132억 달러)을 포함해 5년간 527억 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원 방식은 보조금부터 대출, 대출 보증, 세금 공제까지 포함됐다. 구체적으로 미 상무부는 지난해 12월 영국 BAE시스템즈를 시작으로 자국 마이크로칩테크놀로지·글로벌파운드리 등에 돈을 풀기로 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미국의 자국 기업 우선주의가 더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EU도 맞불을 놓고 있다.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산업 지원에 1조 위안(약 182조 99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2000억~3000억 위안으로 추정되는 국영 반도체 펀드를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EU는 현재 10% 수준인 유럽 기업의 반도체 세계 시장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겠다며 2030년까지 430억 유로(약 61조 원)를 투자한다.
한국은 사면초가다. 글로벌 기술·인력 쟁탈전에서도 뒤처져 있으면서 보조금 지급 전쟁에서도 열세다. 전문가들은 결국 기술 초격차를 더 벌리는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들과 견줘 D램에서 5년 이상, 낸드에서 2년 안팎의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미국 대선 과정에서 양대 후보가 더 강한 중국 견제책을 내놓을수록 우리로서는 미국마저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며 “한국의 경제 안보 상황은 한마디로 사면초가이며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실질적인 해결책은 우리 기업들이 기술력에서 초격차를 가지는 방법밖에 없다”며 “시스템반도체 설계에 있어서도 초격차를 늘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제 안보를 위해 외국인 투자 심사를 강화하고 산업 정책의 제도화에 신경 써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안정적인 공급망과 시장 확보를 위해 호주와의 파트너십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리튬과 니켈, 코발트 등 핵심 광물에 대한 대중국 수입 의존도가 2018년 14%에서 2023년 21.6%로 크게 상승했다. 같은 기간 수입액은 42억 달러에서 93억 달러로 두 배 이상 불어났다.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우리나라가 메모리 분야에서 지배력을 바탕으로 다른 분야 무역 보복에 대해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며 “자원 부국인 호주와 같은 나라는 상호 투자 등을 통해 파트너십을 강화해 안정적인 경제 안보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