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각 대학별 의대 정원을 최종 확정하면서 그동안 거세게 반발했던 의료계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의대 교수들이 25일 집단 사직을 결의한 데다 대한의사협회 새 회장 후보들이 ‘강경 투쟁’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의료 공백 사태가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정부가 전공의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갈등이 봉합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20일 의료계에 따르면 고려대 의료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날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입장문을 내고 “필수의료에 대해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 논의할 협의체를 구성해 달라”며 “정부의 일방적이고 잘못된 정책 추진이 지속되고 대화의 장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의료원 전체 교수가 자발적으로 사직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서울 주요 대학 의대 교수들이 집단 사직 행렬에 동참하면서 의정 갈등은 심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성균관대는 전날 긴급 전체교수회의를 열고 사직서를 취합한 뒤 필요한 시점에 일괄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빅5 병원 연계 대학교수들도 이미 단체 사직을 결의한 상태다. 제주대·건국대 의대 교수들도 사직서 제출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제42대 회장 선거에 돌입한 의협에서는 ‘강경파’의 당선이 유력하다. 후보 5명 중 정운용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부산·경남지부 대표를 제외한 4명이 모두 의대 증원 국면에서 대정부 투쟁 목소리를 높여 의사들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선거에 출마한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은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의 말실수를 ‘의새 논란’으로 부각시켰고 전날에는 조규홍 복지부 장관과 박 차관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했다. 박명하 서울시의사회장은 면허정지 처분을 받은 뒤 “부당한 압박에도 흔들림 없이 (정부 정책) 저지 투쟁의 선봉에 설 것”이라고 밝혔다. 주수호 의협 비대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은 이날 경찰에 출석하며 “14만 의사들의 의지를 모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윤석열 정권 퇴진 운동에 앞장서려고 한다”고 말했다.
의협은 차기 회장 선출을 계기로 집단 휴진이나 야간·주말 진료 축소 등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다만 의료계 대표성 논란으로 의협의 입지가 약해진 상황이나 집단행동 참여율이 높지 않았던 과거 사례를 고려하면 파급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2020년 의협이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에 맞서 집단 휴진을 했을 당시 참여율은 10%가 채 되지 않았다.
이날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전국 의과대학 교수협의회와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는 긴급 회의를 열었다. 의정 갈등 이후 전공의 단체, 의대 교수, 의대생들이 머리를 맞댄 것은 처음이다. 일각에서는 2000명 증원이 이미 확정된 만큼 협상론이 고개를 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투쟁으로 정부 정책을 되돌리는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필수의료 지원책 등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시각이다.
정부는 전공의 복귀를 압박하기 위해 면허정지 처분이라는 ‘채찍’과 근무여건 개선이라는 ‘당근’을 함께 사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19일 자로 의료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 등 1308명에게 ‘즉시 소속 수련병원에 복귀하라’는 업무개시명령을 공시 송달했다. ‘3개월 면허정지’를 내용으로 하는 행정처분 사전통지 절차의 마무리 단계다.
이와 동시에 대형병원의 과도한 전공의 의존 탈피와 전공의들의 장시간 근무를 단축하는 방안에 속도를 낸다. 정부는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들에게 매달 100만 원씩 수련비용을 지원하고 분만·응급 등 다른 필수의료 과목 전공의들로 지원 대상을 넓히기로 했다. 36시간인 전공의 연속근무 시간과 80시간인 주 최대 근무시간 단축도 추진한다.
당장 전공의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다. 이미 면허정지나 군 입대를 각오해 증원 규모 확정만으로 대규모 복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박단 대전협 비대위원장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여기저기 흩날리는 말은 많지만 전공의와 학생은 정적”이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