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박스면 미리 고지해야지, 아침부터 사람 기다리게 하고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22일 오전 9시 20분 서울 영등포 소재의 한 롯데마트. 개점 시간은 오전 10시지만 이미 매장은 길게 늘어선 100명 이상의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들은 모두 ‘9900원 사과’를 구매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매장을 방문한 손님들이었다.
오전 10시에 마트 문이 열리자 대기하고 있던 손님들은 일제히 지하 2층 식품 코너로 달렸다. ‘뛰면 다칠 수 있으니 천천히 이동해달라’는 직원들의 만류에도 일부 고객들은 무빙워크 위를 전력으로 질주했다. 에스컬레이터 앞에서는 몰린 인파에 정체 현상이 나타나면서 자칫 사고로 번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는 등 마트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식품 코너 입구 앞에서 직원들은 사과 사진이 들어간 번호표를 배분했다. 그러나 마트에 구비된 수량은 단 30박스. 마트가 문을 연 지 5분도 되지 않아 사과는 눈 깜짝할 새 동이 났다.
이날 오전 8시 30분께 가장 먼저 마트에 도착한 영등포구 주민 윤 모(72) 씨는 사과 박스를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히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는 “행사가 시작된 21일에 사과를 할인 판매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트 개점 시간에 맞춰 왔다가 구매에 실패했는데 오늘은 일찍 온 보람이 있다”며 “평소 사과를 즐겨 먹는데 올해 들어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 쉽게 사 먹지 못하고 있다. 내일도 아침 일찍 나와 한 박스 더 구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반면 순번에 들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가게 된 고객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서른한 번째로 매장에 도착한 30대 주민 A 씨는 “아침 일찍 나와 1시간 넘게 대기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품절됐다”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릴 줄 예상하지 못했는데 내일 조금 더 일찍 매장에 방문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매장에는 손님들 사이에서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준비된 수량이 30박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트 측에서 미리 고지하지 않았고 정문에서 줄을 서 입장했지만 다른 출입구에서 입장한 손님들이 뛰어가 먼저 번호표를 받는 등 새치기를 했다는 이유에서다.
한 고객은 “인원이 100명 넘게 줄을 서 있는 정문에는 준비된 수량과 관련한 안내 문구가 없었다”면서 “정문 외 다른 입구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아 마트 관계자가 세운 줄에 정직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손해를 보기도 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마트 관계자들은 “모든 입구를 통제하기 어려웠다”며 연신 머리를 숙였지만 손님들의 거센 항의는 40분간 이어졌다. 마트 관계자는 “미리 준비된 수량이 적어 헛걸음한 고객들께 죄송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농산물유통 종합정보시스템 ‘농넷’에 따르면 이달 21일 기준 사과 가격은 ㎏당 5380원으로 지난해 11월 3680원 대비 46.1%가량 상승했다. 지난해 생육기 냉해와 우박 피해 등으로 전년 대비 생산량이 큰 폭으로 감소한 탓이다.
이에 21일부터 서울시는 고물가 대책의 일환으로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가락시장 도매시장 법인 4개사와 협력해 롯데마트에서 2.5㎏ 사과 한 박스를 99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최근 사과 가격이 폭등하는 등 고물가에 지친 주민들이 시중 판매가보다 60%가량 저렴한 가격에 사과를 구매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침부터 ‘오픈런’을 벌이는 진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정부의 대책에도 농산물 물가는 당분간 고공행진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한국은행에 따르면 2월 생산자물가지수는 1월(121.83)보다 0.3% 높은 122.21(2015년 수준 100)로 집계됐다. 지난해 12월(0.1%)과 올해 1월(0.5%)에 이어 3개월 연속 전월 대비 상승 흐름을 이어갔다. 품목별로 보면 농산물(2.6%), 수산물(2.1%) 등이 생산자 물가를 끌어올렸다. 세부 품목을 살펴보면 감귤(31.9%), 배추(26.3%), 우럭(57.9%), 냉동 오징어(6.1%) 등의 상승률이 두드러졌다. 특히 과실류의 경우 지난해 9월 163.9에서 지난해 10월 161.54로 소폭 하락했지만 11월 167.05, 12월 183.28, 올해 1월 207.18, 2월 227.63으로 꾸준히 상승했다.
생산자물가는 일반적으로 1개월여의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성욱 한은 물가통계팀장은 “농산물(2.6%)의 경우 1월(8.3%)보다 상승률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은 아니며 앞으로 수입 과일의 수요 등을 지켜봐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