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관점] ‘넷제로’ 후퇴 속 높아지는 탄소 장벽…‘에너지믹스 전략’ 다듬어야

◆급변하는 글로벌 탄소중립 어젠다

에너지 안보·경제 타격에 화력 발전 확대 등 속도조절

온실가스감축목표 달성 갈수록 요원, 원전 유턴 증가

美·EU, 탄소국경세 등 규제 쌓고 자국산업 경쟁력 제고

“한국, 탄소중립·경제성장 균형 잡도록 종합 대책 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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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 정부는 환경 단체의 반발에도 천연가스 화력발전소를 추가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리시 수낵 총리는 일간 텔레그래프 기고문에서 “에너지 공급을 독재자(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변덕에 의존하는 국가는 결코 안전할 수 없다”면서 “(가스 발전은) 에너지 안보를 위한 보험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만으로는 에너지 안보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미국 등 기후변화 주도국들이 ‘넷제로(Net Zero·탄소 중립)’ 정책 속도 조절에 나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에너지 안보가 위협받고 탈(脫)탄소화 정책으로 제조업 위축과 일자리 감소, 인플레이션 등의 후폭풍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기후변화 정책의 대의에는 공감하면서도 정작 비용 청구서가 날아올 때면 강력 저항하고 있다.

올해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농민 시위가 전 유럽으로 확산된 게 단적인 사례다. 앞서 유럽연합(EU)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농·축산업 분야에 대해 질소비료 감축, 휴경 의무화 등 강력한 환경 규제를 예고했다. 하지만 시위가 도로 봉쇄, 폭탄 투척 등 ‘농민 봉기’ 양상으로 번진 데다 올 6월 유럽 의회 선거를 앞두고 극우 정당이 기승을 부리자 살충제 사용 규제 법안을 폐기하는 등 일부 후퇴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럽 의회는 최근 제조 업체들과 소비자들의 반발에 밀려 내연기관 자동차를 퇴출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거두고 승용차 배출가스 기준을 기존의 ‘유로6’으로 유지하는 ‘유로7’를 통과시켰다. 지난해 독일은 ‘2030년까지 탈석탄 달성’이라는 약속을 뒤집고 베스트팔렌 지역의 석탄 광산 부지 개발을 위해 기존 풍력발전소 7기를 철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국도 지난해 100건 이상의 북해 원유 및 가스전 개발을 허가하고 휘발유·경유 신차 판매 금지 시기를 기존 2030년에서 2035년으로 5년 미루기로 했다. 스웨덴의 경우 올해 예산안에서 기후 대책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유류세 감면 등을 통해 내연기관차 이용자의 부담을 줄여주기로 했다. 기후변화 대응에 막대한 비용이 들고 국민적 반감이 커지자 넷제로 달성 시기를 속속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 대응 “말·행동 따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올 11월 대선을 의식해 전기차 보급을 위해 배기가스 규제를 강화하려던 계획에서 한발 물러설 방침이다. 지지 기반인 자동차 노조가 대량 실직을 우려해 결사 반대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의 친환경 정책으로 미국 자동차 가격이 폭등하고 일자리가 감소하는 등 자동차 산업이 파괴되고 있다”며 재집권하면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백지화, 그린딜 정책 폐기, 파리기후변화협약 재탈퇴 등을 벼르고 있다. 이정아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공화당은 기후변화 대응보다는 자국의 에너지 안보와 공급에 중점을 두고 있다”며 “녹색 보조금 철회도 고려하고 있어 IRA 발효 이후 미국에 가장 많이 투자한 한국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지구촌 차원의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달성도 갈수록 요원해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국제사회의 감축 노력에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은 1990년부터 연평균 1.39% 증가하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특히 세계 4대 배출국인 중국과 인도는 “탄소 중립을 위해 경제성장을 희생할 수 없다”며 외려 화석연료 사용을 늘리고 있다. 중국은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과 허가를 진행 중이고 인도 역시 2030년까지 석탄발전소 용량을 25% 늘릴 방침이다. 지난해 말 열린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는 산유국들의 반대에 밀려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 대신 ‘탈화석연료로의 전환’을 합의하는 데 그쳤다.

청정에너지만으로는 에너지난과 기후위기 대응이 힘들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각국은 속속 원전으로 유턴하고 있다. 이달 21일 올해 상반기 EU 의장국인 벨기에 정부가 브뤼셀에서 주최한 ‘원자력 정상회의’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글로벌 탈원전 기조를 이끌던 유럽의 ‘탈원전’ 폐기 선언으로 평가된다. 유럽에서 원자력의 개발과 활용에 초점을 둔 정상급 회의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연설에서 “안전한 원전의 가동 연장은 청정에너지원 확보와 넷제로를 위한 가장 저렴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영국·프랑스·폴란드 등은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발표했고 이탈리아·스웨덴·벨기에는 탈원전 기조를 철회하거나 연기했다.

나아가 유럽 등 기후 선진국들은 탄소 배출 규제를 새로운 통상 장벽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 등 경쟁국에 비해 과도한 탄소 배출 규제에 따른 역내 생산 비용이 증가하면서 자국 산업이 위협받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EU는 일종의 탄소 국경세인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지난해 10월부터 시범 시행한 뒤 2026년 정식 도입할 예정이다. 철강 등 6개 품목을 EU에 수출하는 기업에 대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량만큼 탄소 비용을 부과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영국·호주·캐나다 등도 비슷한 내용의 탄소 국경세 도입을 예고했거나 검토 중이다.


경쟁국엔 “탄소 비용 부과” 공세


또 EU는 중국 전기차와 풍력터빈 업체가 정부 보조금을 받아 덤핑 공세를 펼치고 있다며 반(反)보조금 조사에 들어간 상황이다.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판 IRA’인 녹색산업법을 제정, 친환경·전기차에 대한 탄소 배출 등을 고려해 보조금을 차등 지급하고 있다. 중국산 제품을 겨냥한 법안이지만 녹색산업법이 EU 전체로 확대될 경우 유럽이 자체 전기차 공급망을 갖추면서 한국 업체들도 영향권에 들어갈 것으로 우려된다. 미국과 EU는 탄소 장벽을 지렛대 삼아 중국 견제에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양측은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중국 등 비(非)시장경제국의 철강 수입을 제한하기 위해 ‘지속 가능한 글로벌 철강 및 알루미늄 협정(GSSA)’ 체결을 논의 중이다.

EU·미국 등은 기후변화를 미래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기회로도 삼고 있다. 미국의 경우 IRA를 제정해 태양광·배터리·전기차 등 중국이 장악한 친환경 분야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관련 제품의 국산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은 EU의 CBAM과 유사한 ‘청정경쟁법안(CCA)’도 추진하고 있다. EU가 지난해 3월 초안을 공개한 탄소중립산업법(NZIA)은 태양광·풍력발전 등 친환경 기술과 제조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 방안을 담았다. 이밖에 일본·캐나다 등도 녹색산업 발전과 탈탄소화 지원을 위해 세액공제, 예산 지원 확대, 소득세 인하 등의 대책을 내놓고 있다.

‘넷제로 후퇴 속 탄소 장벽 강화’라는 국제사회의 변화에 맞서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탄소 중립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고려한 종합적인 에너지믹스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장우석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장은 “지구온난화에 대응한 탄소 중립이나 재생에너지 선점 전략은 일시적인 굴곡이 있더라도 결국 가야 할 방향”이라며 “에너지 전환은 산업·경제 체제 변화와 이해관계자 간의 갈등을 수반하는 만큼 사회적인 공감대 형성을 통해 지속 가능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미래 에너지원인 핵융합 에너지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 강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확보, 석탄발전 설비 감축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 등을 제시했다.


“원전·녹색 투자 확대는 필수”


탄소 중립 이행을 위해서라도 원전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지난해 10월 보고서에서 “에너지 수급을 고려해 탈석탄 속도를 조절하는 한편 탄소포집·활용·저장(CCUS) 기술 개발을 통한 석탄발전의 청정화를 서둘러야 한다”며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과 신규 원전의 조기 건설을 통해 무탄소 전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전 세계 가동 원전(438기) 중 30년이 넘은 원전은 295기(67%)에 달한다. 반면 한국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과속 정책 탓에 ‘계속 운전’ 중인 원전이 전무하다.

특히 글로벌 탄소 장벽 관련 규범이 이제 막 정비되는 단계인 점을 감안하면 정부 차원의 대외 협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의 온실가스 감축 노력을 인정받아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소형모듈원전(SMR) 등의 해외 진출 기회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통상 이슈에 취약한 수출 중소기업들은 컨설팅·기술·금융 등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글로벌 추세에 맞춰 녹색산업 투자를 늘리는 것도 필수 과제다. 글로벌 지수·데이터 제공 업체인 파이낸셜타임스스톡익스체인지(FTSE) 러셀에 따르면 전 세계 녹색경제 규모는 지난해 6조 5000억 달러로 추정된다. 또 넷제로 전환을 위해서는 205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연간 약 7조 달러, 총 200조 달러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산업 조사 기관 블룸버그NEF의 설명이다. 성장성이 높은데도 우리나라의 탄소 중립 관련 기술력은 선도국의 60~80% 수준에 그치고 있다.

김은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신분야협력팀 전문연구원은 “전 세계 친환경 시장의 성장세는 우리 기업의 성장과 해외 진출을 위한 기회이지만 일부 국가의 보호주의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도 예상된다”며 “녹색산업 활성화를 위해 관련 스타트업 육성, 지속 가능한 원·부자재 생산, 해외 녹색 공공조달 시장 활용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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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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