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호황에도 소비와 건설투자가 다시 꺾이면서 경기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수출과 내수 간 괴리가 커지고 대출 연체율은 상승하고 있어 체감경기가 나빠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9일 통계청이 발표한 ‘2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전 산업생산은 전월보다 1.3% 증가했다. 약 2년 만에 첫 4개월 연속 상승세다.
생산 증가는 반도체의 힘이 컸다. 1월 8.2% 감소했던 반도체 생산이 지난달 4.8% 늘었다. 광공업 생산도 3.1% 증가해 3개월 만에 플러스로 전환했다. 반도체 훈풍에 설비투자 역시 전달보다 10.3% 급증했다. 9년 3개월 만의 최고치다.
하지만 내수가 좋지 않다. 지난달 소매판매액은 고물가·고금리에 전월 대비 3.1% 감소했다. 건설 경기도 비슷하다. 1월 반짝 상승(13.8%)했던 건설투자(건설기성)가 1.9% 쪼그라들었다. 선행지표인 건설 수주 역시 1월(-39.6%)에 이어 또다시 -24.1%를 기록했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깊어지면서 미분양 주택도 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이날 발표한 ‘2월 주택통계’를 보면 지난달 전국 미분양 주택은 6만 4874가구로 석 달 연속 불어났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건설사에 3조 원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하고 미분양 주택을 매입하는 ‘기업구조조정리츠(CR리츠)’가 재도입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시장 역시 불안하다. 1월 국내 은행의 원화 대출 연체율은 전달보다 0.07%포인트 오른 0.45%로 집계됐다. 금리 역전 현상도 나타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월 중소기업 평균 대출금리는 4.98%, 대기업은 5.11%로 조사됐다. 경기 둔화에 대기업 대출 수요가 증가하고 중기는 정부로부터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의 정책자금을 지원받은 결과다. 대·중기 금리 역전은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7월 이후 처음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반도체 홀로 지표를 끌어올리다 보니 전반적인 체감지표와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전산업 생산 1.3% 늘었지만
건설투자는 건축·토목 동반 감소
1월 연체액 증가폭 5년여만에 최대
반도체 온기, 내수까지 전달 안돼
당분간 경기 흐름 따로 전개될 듯
건설투자는 건축·토목 동반 감소
1월 연체액 증가폭 5년여만에 최대
반도체 온기, 내수까지 전달 안돼
당분간 경기 흐름 따로 전개될 듯
지난달 전 산업 생산이 1.3% 증가한 것을 두고 기획재정부는 “수출과 내수 사이에 속도 차이가 있지만 (내수 경기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통계청도 소매판매가 감소했지만 소비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서비스업 생산을 같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2월 서비스업 생산은 전월 대비 0.7% 증가했다.
하지만 2월 수치를 뜯어보면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반도체의 온기가 경기 전반으로 퍼지지 않고 있는 데다 경기의 바로미터인 내구재 소비가 감소했고 건설 쪽 경기도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달 건설투자(건설기성)는 건축과 토목 모두에서 각각 전월보다 1.8%, 2.2%씩 실적이 줄었다. 1월에 건설투자가 전월보다 13.8%나 증가해 건설 경기 회복 기대감이 제기됐지만 한 달 만에 다시 1.9% 감소한 것이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재건축과 호남 지역의 액화천연가스(LNG) 공장 건설 덕에 그나마 감소 폭이 줄었다.
건설 경기의 선행지표 격인 건설 수주 실적은 1월과 2월에 각각 전년 동월 대비 39.6%, 24.1%씩 큰 폭으로 쪼그라들었다. 발주도 대부분 공공 부문에서 이뤄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2월 건설 수주액 중 공기업 등 공공 부문 발주액은 총 1조 9880억 원으로 1년 전보다 14.8% 증가했다. 반면 민간·민자 부문은 각각 30.7%, 45.5%씩 급감했다.
소비도 불안하다. 음식료품 같은 비내구재(-4.8%)뿐만 아니라 통신기기와 컴퓨터 등 내구재(-3.2%) 판매가 전월 대비 감소했다.
반도체 의존도는 더 커지고 있다. 2월 제조업 생산은 전년 대비 3.4% 늘었는데 반도체(65.3%)와 전자부품(16.3%) 등의 선전이 주효했다. 반면 자동차(-11.9%)와 기계장비(-8.6%)는 1년 전과 비교해 생산이 감소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달 전체 수출액 중 반도체 비중은 19%다. 1년 전과 비교해 7.1%포인트 증가했다. 같은 기간 자동차는 11.2%에서 9.8%로 줄었다.
시장에서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경기 회복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지만 내수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특히 갈수록 괴리도가 커지는 모양새다. 업계에서는 인공지능(AI) 수요에 반도체 수출 증가 전망이 지배적이지만 일각에서는 반도체 공급 과잉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기업 KPMG가 최근 반도체 기업 고위 경영진 17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을 보면 응답자의 75%는 반도체 공급 과잉이 이미 존재하거나 향후 4년 내 올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앞으로 4년 내 수요 과다로 인한 재고 부족 상황이 나타날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8%에 그쳤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반도체 업황 개선으로 관련이 있는 수출·생산은 증가했지만 내수 경기로는 아직 이어지지 못했다”며 “향후에도 반도체 경기와 내수가 따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연체가 늘고 있다. 1월 연체액은 2조 9000억 원으로 전달보다 7000억 원 늘어나며 2018년 4월(3조 5000억 원) 이후 5년 8개월 만에 증가 폭이 가장 컸다. 연체 증가는 상당 부분 기업대출에서 이뤄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권의 기업대출 연체율은 1월 0.50%로 전월 대비 0.09%포인트 증가했다. 이 중에서도 중소기업(중소 법인+개인사업자) 연체율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중소 법인 연체율은 0.62%로 전월 대비 0.14%포인트나 올랐다. 개인사업자 연체율(0.56%)도 0.08%포인트 상승해 전체 연체율 상승 폭을 웃돌았다. 시중은행의 리스크 담당 임원은 “부동산 경기 악화로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이 확대될 우려가 커지는 만큼 기업 여신 연체율이 더 뛰어오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면서 “연체율 수준이 절대적으로 높다고 보긴 어렵지만 상승세가 좀체 끊이지 않는 게 문제”라고 짚었다.
저신용자들이 찾는 저축은행권의 위기감은 특히 크다. 저축은행의 지난해 12월 전체 연체율은 6.55%로 1년 전보다 3.14%포인트나 뛰었다.
이 같은 상황은 ‘좀비기업’ 증가세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갚지 못하는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이자비용) 1 미만 기업의 비중이 지난해 3분기 말 현재 44%로 나타났다. 2022년 37%와 비교해 7%포인트나 상승했다. 전체 기업의 평균 이자보상배율도 5.1배에서 1.6배로 나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