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며 시작된 가자지구 전쟁이 7일(이하 현지 시간)로 6개월을 맞는다. 그동안 가자지구에선 수만 명이 사망했으며 110만여 명이 기근에 시달리는 ‘생지옥’이 됐다. 출구 전략을 찾기 힘든 상황 속 각종 전염병과 기근 등으로 8월까지 추가로 8만 8000여 명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되는 등 인명 피해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사망자 3분의 2 차지하는 아이와 여성…75년 우방 미국도 휴전 촉구
지난해 10월 7일, 철통 같은 방어벽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국경이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최첨단 감시망도 소용이 없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하마스 무장 세력은 축제 현장, 거리 등을 활보하며 민간인들을 사살했다. 1200여 명이 사망했으며 240여 명이 인질로 잡혔다. 곧바로 이스라엘의 ‘피의 복수’가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궤멸’을 목표로 북부 가자시티를 점령하고 남하하는 군사작전을 펼쳤다. 양측은 11월 말 일시 휴전하고 인질을 석방했지만 12월 1일 전투가 재개되며 지금까지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중부 거점인 데이르엘발라를 거쳐 중남부의 칸유니스까지 남진했고 최남단 라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지도부와 잔당이 라파에 은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지상군 투입을 공언한 상황이다.
그러나 피의 복수를 어느 정도 용인해주는 듯했던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라파 지상군 투입을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현재까지 3만 3000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는데 여기에 최대 140만 명의 피란민이 몰린 라파에서 시가전까지 벌어지면 민간인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다. 사망자 가운데 3분의 2가 아이(1만 3000명)와 여성(8400명)일 정도로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가 컸던 것도 비난 수위가 높아진 배경이다. 3월 2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이 기권한 가운데 첫 휴전 촉구안을 결의하며 이스라엘을 압박했다. 그럼에도 네타냐후 총리는 결의안을 무시하고 라파 진격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75년 우방국’ 미국도 난처한 입장이 됐다. 미국은 이달 1일 국제 구호단체 월드센트럴키친(WCK) 차량에 이스라엘이 오폭해 WCK 직원 7명이 숨진 사건을 계기로 강경한 태도로 돌아서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4일 네타냐후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민간인 보호를 위한 즉각적 조치를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는 사실상 ‘최후통첩’을 날렸다. 바이든 대통령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정책 전환을 시사한 것은 처음이다.
국제구호단체의 비난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WCK의 설립자 호세 안드레스는 최근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글에서 이스라엘군이 자신들과 이동을 조율해온 구호 요원들을 살해했다고 지적했다. 또 이스라엘 정부가 당장 육로를 통한 식량과 의약품 지원을 더 많이 허용해야 하며 민간인과 구호 요원 살해를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이 당장 평화를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번 사태가 인도적 지원을 절박한 수준까지 쥐어 짜는 정책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그는 숨진 구호 요원들이 식량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알기에 목숨을 걸었다고도 밝혔다.
◇'네타냐후의 시간'…라파 진격 놓고 고심
이스라엘은 라파 지상전을 강행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의 정치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누적 재임 기간 16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강경 대응하며 안보를 중시하는 이미지를 내세워 역대 최장수 총리 자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으면서 하마스 소탕과 인질 귀환을 위한 지상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며 권좌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연일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 31일에는 가자 전쟁 발발 후 최대 시위 규모인 10만여 명이 의회 앞에 모여 네타냐후 총리의 우파 연정 퇴진을 요구했다. 네타냐후 총리의 아들인 야이르 네타냐후가 전쟁 시작 전에 출국해 현재까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머물고 있다는 점도 여론의 악화를 불러왔다. 야당은 조기 총선 카드까지 들고나왔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주요 라이벌이자 중도파 야당 국가통합당의 베니 간츠 대표는 3일 기자회견에서 가자지구 전쟁 발발한 지 약 1년이 되는 오는 9월께 조기 총선을 치르도록 "합의된 날짜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집권 리쿠드당은 "지금 선거를 치르면 우리 사회가 마비되고 분열되며 라파에서 전투를 해치고 인질 협상 가능성을 심각하게 해칠 것"이라며 반발했다. 네타냐후 총리가 국민의 커져가는 분노와 사임 요구에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에마뉘엘 나본 텔아비브대 교수는 "네타냐후가 여러 번 정치적으로 매장됐다가 다시 살아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며 "그가 30년간 이스라엘 정치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만이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지만 작년 10월 7일은 그것을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까지 조기 총선을 통한 정권 교체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한 네타냐후 총리가 무작정 라파로 진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국제사회의 눈치를 봐야 할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난 세례를 뚫고 라파 지상전을 감행하더라도 또 다른 하마스 세력이 결집하면 전쟁의 완전한 종식은 어렵기 때문이다. 군 안팎에서는 하마스 완전 소탕이라는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공전 거듭하는 휴전 협상…중동 확전 우려도
지난해 11월 말 1차 휴전 이후 넉 달간 미국과 카타르·이집트가 중재한 추가 휴전 협상은 사실상 답보 상태다. 하마스는 인질 석방을 위해서는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철수와 영구 휴전이 선결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망상에 사로잡힌 요구’라고 일축하며 양측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3주 전 시작된 이슬람 금식 성월 라마단을 계기로 일시 휴전과 인질 석방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도 나왔으나 물거품이 됐다.
이대로 전쟁이 지속될 경우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국지전이 중동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스라엘은 앙숙 관계인 이란의 대리 세력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북부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는데 최근 이스라엘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이란대사관을 폭격해 양국의 직접 충돌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예멘의 후티 반군도 하마스를 외곽에서 지원한다며 지난해 11월부터 세계 물류의 요지 홍해 입구에서 민간 상선을 공격해오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두 국가 해법’이 근본적인 해결법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합의를 통해 독립국임을 서로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한다는 구상인데 이 역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철수를 전제로 한다.
한편 전쟁이 6개월에 접어들면서 가자지구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미국 국무부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가자지구 북부 일부 지역이 이미 기근 상태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세계 식량위기를 파악하는 국제기구 ‘통합식량안보단계(IPC)’도 최신 보고서에서 가자지구 북부 사정이 특히 어렵다며 지금부터 5월 사이에 언제든 기근 단계로 갈 수 있는 상태라고 분석했다. 기근은 IPC 식량위기의 심각성 분류 기준인 ‘정상-경고-위기-비상-재앙-기근’ 중 최고 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