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조 원대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 입찰과 관련해 특정 업체에 유리하게 규정을 수정해 수주를 도운 의혹으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전 방위사업청장이 중견 건설사의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수주 경쟁이 잦은 건설 업계에서는 입찰 비리 의혹으로 수사선상에 오른 고위공직자가 사외이사직을 수행한다면 공정성 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6일 건설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중견 건설사 I사는 주주총회를 통해 A씨를 신규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A씨는 이날부터 3년간 사외이사직을 수행한다. A씨는 감사원 사무총장 출신으로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방사청장을 역임했다.
I사는 2023년 기준 시공능력평가순위 23위를 기록한 건설·환경·제조 종합기업이다. ‘에일린의 뜰’ ‘W’ 등의 아파트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으며 부산·대구·울산 등 지역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
문제는 A씨가 KDDX 사업 입찰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특정 업체에 유리하도록 입찰 규정을 바꿨다는 의혹으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KDDX 사업은 6000톤급 이지스함 6척을 2030년까지 배치하는 사업으로 사업비가 7조 원대에 이르는 대규모 사업이다.
A씨는 방사청이 KDDX 기본설계 입찰 공고를 내기 8개월 전인 2019년 9월 ‘제안서 평가 업무 지침’을 수정했다. 당초 방위산업기술 유출과 관련해 안보지원사령부의 처분 통보를 받으면 0.5~1.5점을 삭감하도록 돼 있었는데 해당 규정이 삭제된 것이다.
당시 입찰에 참여한 현대중공업은 직원들이 KDDX 개념설계도를 빼돌린 혐의로 보안 감사에 걸렸지만 해당 규정 덕분에 경쟁 업체인 대우조선해양을 불과 0.056점 차로 누르고 수주에 성공했다. 지난해 4월 현대중공업 직원 중 8명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수사과는 규정 삭제와 관련해 방사청 고위 관계자를 입건해 조사를 벌여왔으며 지난해 8월에는 방사청 과천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이어 지난해 12월에는 A씨 자택 등 2곳에 대해 강제수사를 벌였다.
한 건설 업계 관계자는 “수주 경쟁이 다른 곳에 비해 매우 치열한 곳이 건설 업계”라며 “입찰 관련 문제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전직 고위 공직자가 들어온다면 공정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회사측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I사 관계자는 “아직 A 전 청장에 대한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고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며 “선임 절차상에도 문제가 없고 동종 업계가 아니기 때문에 기업의 이점이 있을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전문가는 A씨의 사외이사 선임이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만종 호원대 법경찰학부 명예교수는 “고위 공직자 출신이 수사 도중에 업체 사외이사로 가는 행위는 도덕성을 요구하는 국민 정서에 반하는 것”이라며 “전관예우 등 불필요한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외이사직을 수행하면서 경찰 조사에 성실히 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