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가 세계 어디를 가나 통용되는 시대다. K팝부터 K드라마·K웹툰·K뷰티 등 수많은 K콘텐츠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한국의 또 다른 ‘효자 산업’ ‘수출 역군’이 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이면에서는 K콘텐츠 산업 성장이 정체기를 맞이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발표한 ‘2024 해외 한류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1년 공개된 ‘오징어 게임’이 아직도 최선호 K드라마 1위에 올랐다. 한국 영화도 2019년 작품 ‘기생충’과 2016년 작품 ‘부산행’이 각각 1·2위에 올랐다. K팝 부문에서도 그룹 활동을 잠시 멈춘 BTS와 블랙핑크가 1·2위에 올라 새로 흥행하는 K콘텐츠가 부재한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한류에 대한 평균 호감도도 하락하고 있고 지나친 선정성과 콘텐츠의 획일화는 한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키우고 있다.
K콘텐츠 세계화의 첨병인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조현래 원장은 “끊이지 않는 혁신으로 위기를 타개해야 할 때”라고 짚었다. 17일 서울 콘텐츠코리아랩(CKL) 기업지원센터에서 만난 조 원장은 “K콘텐츠가 전에 없이 높은 글로벌 위상을 갖게 됐지만 최고점에 있을 때도 성공 뒤에 이어질 위기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며 취임 3년 차의 소회를 밝혔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플랫폼 등에 의해 글로벌 콘텐츠 시장이 열린 것이 K콘텐츠에는 기회였지만 동시에 더욱 많은 경쟁자를 상대하고 시장의 빠른 변화에 대응해야만 했다. 조 원장은 “기존에 없던 지원 방식을 고민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기관 역량 강화를 이끌어왔다”며 “지식재산(IP)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콘텐츠 산업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국내 제작사들에 IP 보유는 성장성과 수익성이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경쟁력 있는 IP를 보유할 권한을 얻지 못한다면 해외 거대 플랫폼과 자본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조 원장은 “디즈니·마블·산리오 등 글로벌 슈퍼 IP를 보유한 기업은 시장을 선도하며 지속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며 “K콘텐츠도 경기 침체, 제작비 상승 등으로 인한 어려움에 대비하기 위해 슈퍼 IP를 발굴해 육성하고 신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프랑스에서는 IP를 제작사가 보유하게 하는 법이 있다”며 “이해관계자가 많기는 하지만 그런 법도 도입을 단계적으로 고민해봐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를 위해 콘진원은 지난해 태스크포스(TF)로 시작했던 IP 지원부서를 콘텐츠IP본부로 강화하고 IP비즈니스 지원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중소제작사 지원을 위해 지원금을 현실화해 과제금 평균 지원금 규모를 36% 늘리고 원스톱 융자를 신설하고 제작 시설 등을 확충한다. 현대자동차·GS리테일 등 대기업이 참여하는 K콘텐츠 IP 글로벌 포럼을 신설하고 콘텐츠 IP마켓도 강화한다.
조 원장은 “사업 재편은 하나의 사업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업을 엮어 시너지를 내는 네트워킹이 필요한 것”이라며 “나아가 콘텐츠 산업 외 연관 산업과도 융합과 확장을 통해 시장을 넓혀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콘진원의 노력에 IP 비즈매칭 지원 실적은 2022년 2941건에서 지난해 4078건으로 39% 늘었고 제작 지원 매출 실적은 2022년 1692억 원에서 지난해 2940억 원으로 74% 증가했다.
올해 콘진원의 업무 중심도 역시 K콘텐츠 수출 지원에 방점이 찍혀 있다. 2022년 K콘텐츠 수출액은 132억 달러를 넘어서 2차전지와 가전 수출액을 뛰어넘었다. 콘텐츠 수출이 1억 달러 증가하면 연관 산업인 화장품·식품 등 소비재 수출도 1억 8000만 달러가 함께 증가한다는 후방 효과도 있는 만큼 정부는 2027년까지 콘텐츠 수출액 25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도 내놓았다. 지난해 수출 지원은 3억 1800만 달러로 2022년의 2억 4000만 달러에 비해 크게 늘었지만 아직 부족하다. 조 원장은 “10만 개에 달하는 국내 콘텐츠 기업이 다양한 권역의 해외시장에 맞춤형으로 진출하기 위한 토대를 닦을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우선 지난해 15개였던 해외 비즈니스센터를 올해 25개소까지 확대한다. 조 원장은 “역할을 강화해 각 시장 환경에 맞게 기업이 진출하고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게 지원할 것”이라며 “연관 산업과의 동반 수출도 구글·마플샵과 함께 확대해 웹드라마로까지 넓힌다”고 밝혔다. 해외 비즈니스센터는 2027년까지 50개로 늘릴 예정이다. 수출 지원 예산은 지난해 646억 원에서 올해 994억 원으로 54% 증가한다.
그는 “나아가 가장 원하는 방향성은 그간 정부 예산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놓쳤던 새로운 기회 시장을 두드려 보는 것”이라며 “3월 다녀온 프랑스의 유럽 최대 시리즈 마켓인 ‘시리즈 마니아’가 그 사례로 유연성을 최대 장점으로 가진 K콘텐츠가 기존 시장을 흔들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목표를 밝혔다.
이러한 지원은 시장지향적이고 기업 주도적으로 운영된다. ‘정부 주도의 K콘텐츠 진흥 산업이 산업의 자생적 성장력을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업계의 우려에 조 원장은 “한국콘텐트진흥원의 사업은 언제나 현장 요구 사항을 기반으로 사업을 전개한다”며 “콘진원이 산업을 주도해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 원장은 “업계의 요구를 긴밀히 파악하기 위한 활동과 협력 채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취임 후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해온 콘진원은 최근에는 문체부와 국내 OTT 5개사와의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등 업계의 네트워크 구축에 큰 힘을 쏟고 있다. 프랑스 국립영화영상센터(CNC)와 MOU도 체결해 양국의 창작 교류도 이끌어 냈다.
그는 “기관의 올바른 역할은 기업과 창작자, 제작자들이 실패 리스크를 줄이고 마음껏 실험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콘진원의 1년 사업 예산은 글로벌 OTT가 K콘텐츠에 투자하는 비용보다도 낮다”며 “금융기관과 연계해 시장에 자금이 흐를 수 있도록 길을 열고 다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10개 선도기업이 함께한 뉴콘텐츠아카데미, 산업은행이 함께한 K콘텐츠산업 스페셜라운드 등이 좋은 사례다.
조 원장은 콘텐츠 산업 발전을 위한 ‘종합적 시각’을 강조했다. 콘텐츠 산업이 점점 복잡해지고 다각화되는 만큼 업계 현업자들의 시각도 자연히 자신의 분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콘진원의 역할이 더욱 막중해진다. 조 원장은 “콘진원은 다양한 장르와 분야를 다루고 있어 산업 전체를 종합적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며 “원내 정책연구센터와 사업 부서는 각자의 시각과 업계 간 소통을 통해 전체적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통과된 제작비 세액공제율 확대 또한 업계 현황과 해외 사례 분석, 사전사후 업계 의견 수렴, 보고서 발간, 언론과의 소통 등이 함께 만들어 낸 산물이다. 중소기업의 영상 제작비 세액공제율은 10%에서 30%로 3배나 늘었다. 그는 “뉴턴의 말처럼 ‘거인의 어깨’ 위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8월로 임기를 끝마치는 조 원장이지만 파리 올림픽 등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그는 “‘정말 일 잘하는 기관의 기관장이었다’는 평가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콘진원은 글로벌 교류의 주체가 돼야 한다”며 “해외의 다양한 카운터파트와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우리가 주체적인 역할을 가운데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직원들이 더 넓은 시야로 업계의 수요를 파악하고 다양한 기업 및 기관과 협력해 한정된 자원이지만 더 많은 사업 기회를 만들어내는 기관으로 성장했으면 한다”며 “K콘텐츠의 높아진 위상만큼 높은 위상의 콘진원으로 업계와 국민들에게 인식되기를 바란다”고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