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경제지표는 여전히 우리에게 (물가가 안정된다는) 자신감을 주지 않았고 이런 확신을 갖기까지는 예상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다”고 밝혔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지난 16일(현지 시간) 이 같이 밝혔다. 파월 의장이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를 되돌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는 미국 경제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날 미국의 성장률 예상치를 기존 2.1%에서 2.7%로 0.6%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이러한 수치는 유로 지역(0.8%)의 세 배가 넘고 한국(2.3%)보다 0.4%포인트 높다. 경기가 좋아 연 5.25~5.50%의 기준금리에도 물가가 잡히지 않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대해 피에르올리비에 구랭샤스 IMF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미국의 호조는 높은 생산성과 고용 증가세를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지난해 4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생각보다 좋았고 연방정부의 지출도 지속되고 있지만 기저에는 노동유연성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고용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높은 유연성→일자리 증가→소비 확대’의 구조다. 미국의 3월 비농업 일자리는 30만 3000개 증가하며 시장 예상치(20만 개)를 크게 웃돌았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17일 “미국은 노동 시스템이 우리와 달리 유연하다”며 “이 부분이 민간의 혁신과 결합하면서 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미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구매력평가지수(PPP) 적용 시 75.5달러로 룩셈부르크(100.2달러) 등에 이어 세계 4위다. 반면 한국은 43.1달러로 미국의 57.1% 수준이다. 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미국의 50대 이상 근로자의 근속연수가 한국보다 더 높은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해고도 고용도 기업 상황에 맞게…실업률 4년만에 15%→3%로
2020년 3월 코로나19 팬데믹 직전 3.5% 수준이던 미국의 실업률은 단 한 달 만에 15%까지 치솟았다. 미국 고용 시장의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4년이 흐른 지금 미국의 실업률은 3.7%로 완전 고용 수준이다. 성장률도 가파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미국의 올해 경제성장 전망치를 2.1%에서 2.7%로 상향 조정한 배경이다.
실업률이 낮아도 일할 사람이 부족해 노동시장이 긴축됐던 2022년과는 천양지차다. 웬디 에델버그 브루킹스연구소 연구팀장은 “연말까지 매달 큰 폭의 고용 수치를 보게 될 것”이라며 “그렇다고 해서 노동시장이 너무 과열된다는 우려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노동 공급이 늘고 있는 만큼 노동 생산성 역시 높아졌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최근 세 분기 동안 생산성 상승률은 팬데믹 이전 10년간 평균 생산성 상승률보다 세 배 이상 높았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당시 고용 붕괴를 걱정하던 미국이 미스터리할 정도의 경제성장을 일구는 비결로 자유로운 해고와 채용 문화를 지목한다. 기업의 상황에 맞게 인력을 줄이거나 다시 늘릴 수 있는 미국 특유의 노동 유연성이 팬데믹 위기를 딛고 성장률을 끌어올린 핵심 요인이라는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대 교수는 지난해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팬데믹 당시 유럽과 미국의 근로자 보호 정책을 비교하면서 “나의 판단은 미국이 옳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해고를 막기 위해 고용주들에게 인력 고용 보조금을 지불하는 정책을 폈다. 미국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기업이 한계 상황에 내몰리지 않도록 유연한 해고를 보장하되 실업수당을 확대해 근로자들을 보호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의 코로나19 대응은 비록 일시적으로 높은 실업률을 초래했을지언정 강력한 회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진단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빅테크와 금융 업계의 대규모 감원 바람도 고급 인력 재배치 효과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해고 데이터 분석 서비스인 레이오프닷에프제이아이에 따르면 지난해 빅테크 기업은 코로나19 기간 과잉 채용을 정리하기 위해 26만 명 이상의 직원을 감원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실업률이나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정보기술(IT) 인력 전문 회사인 인사이트글로벌의 버트 빈 최고경영자(CEO)는 “팬데믹 당시 대기업에 밀려 IT 인력을 채용할 수 없었던 미국 전역의 중소기업들이 개발자 등을 채용하고 있다”며 “채용 수요는 압도적인 규모”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 산업계 전반적으로 노동 유연성을 기반으로 한 비용 구조 개선과 고급 인력 확보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미국 주요 기업들은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금융 정보 업체 팩트세트에 따르면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소속 기업들의 매출 성장률은 지난해 2분기 0.9%까지 떨어진 후 지난해 3분기 4.0%까지 회복했으며 올해 4분기에는 5.7%로 성장세가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민 증가 역시 미국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은 2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2033년 노동력은 520만 명 증가할 것으로 보이며 이는 주로 순이민 증가에 따른 결과”라며 “노동력이 증가하면서 2034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은 이민이 증가하지 않는 경우보다 약 7조 달러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 많은 근로자가 일자리를 빈틈없이 채우면서 미국 내 소비도 호조세다. 미국 소비의 주요 지표인 소매판매는 3월 전월보다 0.7% 늘어나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집계한 전문가 예상치 0.3%를 크게 웃돌았다. 여기에 2월 소매판매 증가율도 종전 0.6%에서 0.9%로 상향 조정됐다. 소비는 미국 GDP 성장의 3분의 2를 떠받치는 주춧돌로 평가 받는다. 팬데믹 당시 미국 정부가 대규모 재정지출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재정 쿠션을 제공했던 점도 탄탄한 소비력이 유지되는 데 기여했다.
최근에는 미국 내 법인 설립이 늘어나면서 경제의 지속 성장성에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 내 제조업 건설 지출은 올 1월 말 기준 2249억 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해외 진출 미국 기업을 다시 유치하는 리쇼어링과 인플레이션감축법 등에 따라 해외직접투자(FDI)가 확대되면서다. 이는 또다시 고용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 민간 기관인 리쇼어링이니셔티브에 따르면 리쇼어링과 FDI를 통해 창출된 일자리는 지난해 상반기에만 약 37만 개로 2022년 연간 수치(34만 개)를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