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이끄는 극우 정권의 입김에 이탈리아에서 46년 간 법으로 보장된 낙태권이 흔들리고 있다.
23일(현지시간) AP,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이탈리아 상원은 이날 표결에서 정부가 발의한 낙태 관련 법안을 찬성 95표 대 반대 68표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낙태를 시술해주는 클리닉에 낙태 반대 단체들이 접근해 여성들의 임신 중절 결정에 사실상 개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어서 이탈리아 안팎에서 거센 논란을 불렀다.
법안은 지난 16일 하원을 통과한 데 이어 이날 상원까지 무난하게 통과하면서 멜로니 총리의 극우 행보에 또다시 승리를 안겨주게 됐다.
이탈리아는 가톨릭 국가이긴 하지만 1978년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 194호’(Law 194)를 제정한 것을 기점으로 46년 간 낙태권을 인정해왔다. 이 법은 임신 12주 이내 낙태를 허용하고, 이후에도 여성의 건강과 생명이 위험해진다면 임신 중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출생률이 15년동안 하락세를 보이며 세계에서 최저 수준을 기록하자 이를 틈타 극우 세력들은낙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지난해 신생아 수는 37만9000명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멜로니 총리는 보수 진영을 등에 업고 개인적으로도 낙태 반대 입장을 내세우며 이번 법안을 강행해왔다. 멜로니 총리는 최근에는 이번 법안에 대한 국내외 반대 목소리와 관련해 “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정보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번 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에는 “무지하다”고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이는 앞서 아나 레돈도 스페인 양성평등부 장관은 이탈리아의 낙태권 후퇴를 우려하는 의견을 피력한 데 따른 반응이다. 레돈도 장관은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옛 트위터)에 “낙태하려는 여성에게 조직적인 압력을 가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법이 인정하는 여성의 권리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탈리아를 겨냥했다.
이탈리아 여성계와 야당 역시 이번 법안에 반발하고 있다. 가톨릭 전통이 강해 현실적으로 낙태가 쉽지 않은 환경에서 낙태 반대 단체들이 낙태 희망자에게 접근하는 게 법적으로 허용된다면 낙태권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에서다.
2017년 이탈리아 정부 통계에 따르면 이탈리아 산부인과 의사의 68.4%는 ‘양심적 낙태 거부자’로 분류된다. 일부 지역에서는 거의 90%에 달할 정도로 낙태 시술을 받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민주당 한 의원은 “정부는 그들이 '법 194호'에 손을 대려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진실은 우파 진영이 여성의 생식 자율성에 반대하고, 모성애, 성, 낙태에 관한 여성의 선택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좌파 진영에선 이번 법안으로 자칫 미국과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미국은 1973년 낙태권을 인정한 역사적 판례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이 2022년 연방대법원에서 폐기되면서 곳곳에서 임신 중절 수술이 제한되고, 정치적으로도 쟁점화하는 등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이같은 행보는 다른 유럽 국가와도 어긋난다. 프랑스는 지난달 헌법에 낙태의 자유를 명시한 사상 첫 국가가 됐다. 독일 정부도 이달 15일 임신 12주 이내 낙태 금지 조항을 형법에서 삭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유럽에서 낙태를 가장 엄격하게 제한하는 폴란드에서도 낙태 합법화를 추진 중이다. 폴란드 하원은 지난 12일 임신 12주 이내 낙태 합법화를 포함한 4개 법률 개정안을 특별위원회에 넘겨 계속 검토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