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대증원과 필수의료 패키지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을 떠난지 오늘로 70일입니다. 의정갈등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극한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켜보는 국민들의 불안감과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국민들은 대체 언제까지 이 같은 답보상태를 견뎌야 할까요.
지난 25일 대통령 주재 의료개혁특별위원회(특위)가 출범했습니다. 국민들은 특위에서 의정갈등의 해법이 제시되길 목놓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특위의 의제는 △필수의료 보상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의료 전달 체계 개편 △전공의 수련 국가책임제 △지역 거점 병원 육성 △계약형 지역필수의사제 도입 △의료 인력 수급 추계·조정 시스템 구축 등이었습니다. 가장 뜨거운 감자인 '의대 정원'은 애초부터 특위의 의제가 아니었던 거죠. 특위의 위원장인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은 “의료개혁특위는 의료 체계와 제도 개혁을 조금 더 큰 틀에서 논의하는 기구로 의료 인력에 관한 수급 조정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의대 정원을 논의하는 기구는 아니다”라며 “구체적인 의대 정원을 논의할 계획은 현재로서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의료계와 공식·비공식 채널로 접촉 중”이란 말만 반복하는 정부
정부는 세달째 의료계를 향해 "집단행동을 접고 논의의 장으로 나와달라"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2025학년도 의과대학 자율증원'으로 '2000명 증원'이라는 고집을 꺾은 만큼 이제는 의료계에서도 통 큰 양보를 해달라는 얘기죠. 하지만 정부의 태도변화와 유화 제스처는 의료계와의 줄다리기에서 그 어떤 레버리지로도 작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의료계가 운동장에 나오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죠.
국민들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공의 이탈초기부터 '3개월 면허정지'와 사법처리 등에 대해 엄포를 놓았던 정부가 대체 해결한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죠. 정부는 4·10 총선을 앞두고 의정갈등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이 커지자 전공의들에 대한 '유연한 처분'을 추진키로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유화 시그널에도 전공의들은 복귀하지 않았고 또 한 달이 흘렀습니다. 정부는 '유연한 처분'이 대체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한달 동안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연한 처분과 관련해 '당정 협의 중'이라는 지난달 답변에서 업데이트 된 것이 없습니다. 정부는 그저 "특위가 구성됐으니 의료계는 테이블에 앉아서 같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자",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전공의협의회에 공식, 비공식 채널로 접촉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할 뿐입니다.
의료계, ‘과학적이고 통일된 안’ 현실적으로 내놓기 어려워
정부는 의료계를 향해 "과학적이고 통일된 안을 가져오라"고 반복하면서도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24일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필요의사 수' 추계에 대한 논문 공모를 추진하겠다고 하자 정부는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습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지난 24일 오전 의사 집단행동 중앙안전재난대책본부 브리핑을 통해 "4월 말 전에 (의료계의) 과학적이고 단일한 대안 나와야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며 "(연구) 결과가 언제 나올지 불확정하고 입시 (준비하는) 학생들과 학부모 이해관계도 있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박 차관은 "추계 검증과 대안이 있어야 한다"며 수개월 내 정교한 형태의 연구와 논문이 나오기는 어려운 만큼 서울의대 교수들의 주장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의료계는 대한의사협회(의협),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전국의대 교수 비상대책위원회,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등 여러 직역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의대증원 전면 철회에 대한 생각만 동일할 뿐 직역별 입장과 생각은 다릅니다.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몇개월 내에 의사 수급에 대한 논문을 공모한다고 해도 다른 직역에서 수용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만일 '현재 의사수가 모자르니 어느 정도의 증원은 필요하다'라는 결론이 나오면 일부 의료계에서 '논문 작성자의 편향된 시각이 반영된 연구 결과', '절대로 의료계를 대표할 만한 연구결과로 인정할 수 없다'라는 입장을 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직역에서 각자 추계를 돌리겠다라고 나설 수도 있습니다. 정부가 말하는 '과학적이고 통일된 안'이란 결국 실현 불가능한 얘기에 가깝습니다. 정부도 이를 모르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의협, 전공의협에 연락을 취하고 있다"라고 우리 할일을 다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항변하는 건 국민 입장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환자들의 생명은 촌각을 다투기 때문이죠. '현 상황의 책임이 의료계에 있는 것'이라고만 치부해 버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료계, ‘정부 정책 전면폐지’ 보다는 ‘선별적 수용’이 국민에게 합리적으로 읽혀
의료계도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의료계는 '의대증원 백지화'와 '필수의료 패키지 전면폐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수의료 패키지안에 들어 있는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수가 인상, 의료사고 법적책임 완화,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필수의료 패키지 전면폐지를 요구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필수의료 패키지안에 A 안건은 우리가 100% 찬성하지만 B안건은 절대로 수용 못한다"라고 선별적으로 협상에 나서는 것은 어떨까요. 국민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현재 국민들이 바라보는 전공의와 정부 간 싸움은 '지금 전공의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냐'(전공의들 입장)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해 줄게(정부, 필수의료 패키지) →필수의료 패키지 전면 폐지하라(전공의들 입장)로 보입니다. 납득이 가지 않는 도돌이표 같습니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의대를 증원하면 의료인 공급이 늘어나 우리가 개원의가 된 후 매출 하락이 우려된다. 개원면허제, 미용자격 개선, 혼합진료 금지 등도 우리가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내 다른 정책은 수용하겠다'라고 주장하는 게 더욱 합리적으로 느껴집니다. 기존에도 우리나라 의료 체계에의 문제가 많았다고 호소하면서 정책 발표 이전으로 회귀하라라고 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죠. 기존 우리 의료체계의 모순점이 가진 파도를 계속 타겠다는 얘기와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료 체계 문제, 양측 모두 인정…미래 세대 부끄럽지 않으려면 머리 맞대야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현재의 잘못된 현황과 제도를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없다고 현재 잘못된 시스템과 생태계를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미래 세대에 죄악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미래에는 내가 살지 않을테니 환경오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말이죠. 우리 사회는 지금 갈등해결 시스템을 잃어버렸습니다. 합리적인 토론과 대화는 사라졌고, 서로 간의 말폭탄만 주고 받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어느 영역도 매한가지입니다. 정부와 의료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와 의료계의 드잡이를 바라보는 국민들과 환자들은 불안하고 안타깝습니다. 모두 '국민'과 '환자'라는 숭고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정작 조직의 논리를 대변할 때가 많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현 의료체계에 문제점이 많다는 건 정부도 의료계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부와 의료계 모두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현 상황을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요. 아무쪼록 미래 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결론으로 수렴되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