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클래식 음악 아래 유럽풍 호텔처럼 꾸며진 로비는 공장에서 나오는 ‘양산빵’ 팝업스토어라고는 믿기 어렵도록 고풍스러웠다. 곳곳에 걸린 삼립 ‘정통크림빵’ 패러디 명화가 아니었다면 이 공간의 진짜 목적을 눈치채기 어려웠을 정도다.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자 포크를 들고 크림을 맛보며 고민하는 방문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저마다 선호하는 맛에 투표하기 위해 분홍색 공을 유리관 안에 집어넣었다.
8일 찾은 서울 성수동 SPC삼립 정통크림빵 60주년 팝업스토어는 일종의 ‘투표소’다. 삼립은 이곳 ‘크림 아뜰리에’에서 9가지 맛을 실험 중이다. 15일까지 투표한 결과 1등으로 집계된 크림은 상반기 내 신제품 출시에 반영된다. 여기에는 인공지능(AI)이 개발에 참여한 ‘마라맵고수’맛까지 포함됐다.
무려 60년간 큰 변화 없이 정통크림빵의 틀을 유지했던 삼립이 새로운 맛을 내놓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SPC 관계자는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신제품을 내놓고 싶어하는 아이디어가 항상 있었지만, 이전까진 대량 생산이 쉽지 않았다”면서 “이번 팝업을 계기로 나올 새 맛이나 얼마전 출시된 ‘크림 대빵’은 기존 상품군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매출을 견인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상설 매장 없이 공장에서 빵을 생산하는 삼립에게 이번 팝업은 귀한 기회다. 두 눈과 귀로 직접 소비자 반응을 확인할 수 있어서다. 실제 이날 방문객 한명 한명에게 ‘어떠셨냐’고 묻는 마케팅 부서 직원들의 눈빛은 진지했다. 직접 투표가 이뤄지는 분홍색 공 이외에도 소비자 의견을 수렴하는 대면 창구인 셈이다. SPC 관계자는 “팝업에 진열된 맛을 당장 모두 출시할 순 없겠지만 장기적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싶으면 검토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가능성을 열어뒀다.
3일차인 이날 오전까지는 ‘구운버터맛’이 단연 인기를 끌었다. 개발에 참여한 홍문섭 파티쉐는 팝업에 상주하며 두 손으로 쉴 새 없이 크림빵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는 “구운버터맛은 마들렌과 함께 현재 디저트 시장을 이끌고 있는 ‘휘낭시에’를 모티브로 잡았다”면서 “버터를 태운 다음 계란 흰자를 넣고, 아몬드 가루까지 넣어 만드는 레시피를 그대로 가져와 같은 재료로 고소하면서도 짭짜름한 맛을 냈다”고 설명했다.
1964년 세상에 나온 정통크림빵은 누적 19억 봉이 팔려 나간 스테디셀러다. 출시 당시엔 아침부터 제품을 사기 위해 공장 앞에 줄까지 늘어섰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국내 최초로 자동화 설비를 갖추고 비닐 포장된 ‘국민 간식’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만 해도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크림은 삼립에서 전용 가마를 개발하며 비로소 대중화가 시작됐다고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