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고가 몇백억 원 들어가는 사업도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치는데 몇조 원이 소요될지 모르는 법 개정을 꾀하면서 재정 소모를 막을 안전장치가 없습니다.”
최근 만난 한 농촌경제학 전문가는 야당이 강행 중인 양곡관리법과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 안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두고 이같이 꼬집었다. 남는 쌀을 의무 매입하고 농산물 가격을 의무 보장해주는 두 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연간 조 단위 대규모 재정지출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데 심도 있는 논의 자체가 없었다는 지적이다.
정치권의 나태함은 야당이 내놓은 ‘농안법 도입 시 재정 소요 추정 시나리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벼·양파 등 16개 작물의 시장가격이 기준가격 밑으로 떨어졌을 때 차액의 85%까지 보장해줘도 재정 소요가 크지 않다는 이 시나리오는 2005~2015년 가격과 당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건물 하나를 지을 때도 물가가 전년보다 오르면 비용 추계를 다시 하는데, 최소 10년은 지난 데이터를 들고 와 법안 통과를 주장하는 셈이다.
게다가 더불어민주당은 두 법 개정안이 시장 자체를 왜곡해 농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매년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것은 둘째 친다고 해도 법안이 통과되면 가격 보장 품목으로의 생산 쏠림과 수급 불균형은 불 보듯 뻔하다. 어떻게든 생산량만 늘리면 가격을 보장해주니 샤인머스캣, 스테비아 토마토 등 기존 상품과 질적으로 차별화·고급화된 농작물을 생산할 유인도 사라진다.
농가와 학계에서 이 같은 우려를 연일 한목소리로 쏟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농업 정책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점을 이용해 두 법안을 ‘민생 법안’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미 ‘이재명 대표의 1호 법안 대(vs) 윤석열 대통령의 1호 거부권(재의요구권) 법안’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만큼 알맹이가 없어도 밀어붙이자는 심산으로 보인다.
정쟁의 수단으로 소모되기에 두 법 개정안 통과에 따른 부작용이 막대하고 명백하다.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진행 시 예타에 준하는, 법안에 대한 면밀한 원점 재검토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