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0여년 전 고대 로마의 호민관이었던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빈민층을 돕기 위하여 밀을 싼값으로 배급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난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경쟁으로 빈민층에게 공짜로 밀을 배급하는 제도로 변질됐다. 덕분에 유명한 로마 정치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권했을 때는 공짜로 밀을 배급받는 사람의 수가 32만 명으로 늘어나 국가 재정에 엄청난 압박을 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고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각 가구의 소득과 가족 수 등을 공정하고 엄격하게 조사하는 안찰관을 둬 무상으로 밀을 배급받는 사람의 수를 32만 명에서 15만 명으로 줄였다. 이 같은 정책 변화에 대해 빈민층의 투쟁 또는 반발은 없었다고 한다. 현재 한국 국민들은 당시 로마인들보다 교육 수준도 높고 합리적이지만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만 계산해 카이사르와는 달리 필요한 개혁을 외면하고는 한다. 국민연금 개혁이 그 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 TV 토론에서 3인의 유력 대선후보들은 누가 당선돼도 연금 개혁을 서두르겠다고 약속했다. 대선 후 국회 연금개혁특위에서 논의는 TV 토론 약속만큼 진전을 보이지 못하다가 21대 국회 막판 여야는 국민이 내는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올리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노후에 받는 급여 수준(소득대체율)에서 이견을 도출하며 전체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현행 40%인 소득대체율 인상 폭을 두고 팽팽히 맞서던 중 21대 국회 마지막 1주일을 앞두고 야당에서는 여당의 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지만 여당은 기초연금과의 관계를 고려한 구조 개혁도 함께 이뤄야 한다며 야당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후 여야 정치인들의 여러 가지 주장들이 제기되며 혼선을 빚는 가운데 연금 개혁은 다시 22대 국회로 넘어갔다.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보험료율·소득대체율과 같은 모수 개혁과 기초연금·재정 등과의 관계를 고려한 구조 개혁을 순차적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일괄적으로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두 가지 개혁 모두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맞다. 9% 보험료율과 40% 소득대체율의 현행 연금 체계에서 기금 고갈 시기는 2055년으로 추산되지만 보험료율을 13%로 소득대체율을 44% 내지 45%로 인상할 경우 기금 고갈 시기는 2063년 또는 2064년으로 미뤄진다. 따라서 국민연금 재정 안정화와 노후 소득 보장이라는 두 문제를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모수 개혁은 필요하다.
모수 개혁과 더불어 기초연금·국민연금과의 관계를 재정비하는 구조 개혁도 필요하다. 65세 이상 고령층에서 소득 하위 70%가 받는 기초연금의 경우 현재 1인 가구는 최대 33만 4810원, 부부 가구는 최대 53만 5680원을 수령하고 있다. 이 기초연금을 대통령 공약대로 40만 원으로 인상하면 부부 가구의 경우 64만 원을 받는데 이 액수는 현재 국민연금의 평균 액수인 62만 원을 상회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국민연금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는 사람이 받는 기초연금이 국민연금보다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에 국민연금 가입 의욕을 떨어뜨려 기금 고갈을 더욱 부채질할 수 있다. 따라서 기초연금을 인상하려면 국민연금과 연계해 형평성을 유지하는 구조 개혁도 모수 개혁 못지않게 중요하다.
연금 개혁에 있어서 정치인들이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국민연금 문제는 기금이 고갈할 때 본격적으로 불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민연금 문제는 기금이 고갈하기 전 해마다 지급해야 하는 연금 급여가 그해 거둔 보험료로 충당되지 않을 때 시작한다. 지난달 22일 열린 국민연금 공청회에 따르면 이 시기는 2030년으로 예상되는데 이때부터는 국민연금 급여 지급이 보험료로 충당되지 않기 때문에 기금을 깨서 지급해야 한다. 즉 급여 지급을 위해 국민연금이 보유한 주식·채권 등을 매각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2030년이라는 것이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 국내 대기업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주식 매각이 국내 금융시장에 미칠 충격은 명약관화하다.
여야는 이러한 점을 명심해 22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연금개혁특위를 조속히 구성하고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국민 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연금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2000여년 전 로마인들처럼 한국 국민들도 납득할 것이다. 연금 개혁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