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난데없는 폐암 진단에 눈앞이 캄캄했는데 그 비싼 약을 아무 조건 없이 지원해 준다니 어찌나 고맙던지요.”
4일 은평성모병원에서 만난 이현술(71·남) 씨는 “항암제 무상공급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작년 6월 흉부 엑스레이 영상에서 폐 이상 소견이 확인돼 정밀검사를 받았다가 ‘비소세포폐암 4기’로 진단됐다. 이씨의 폐에 생긴 종양은 1.9㎝로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였다. 그런데 전신 PET-CT(양전자방출 단층촬영)와 뼈스캔 검사 결과 오른쪽 골반뼈 전이가 확인됐다. 이씨는 “척추관협착증 수술을 받은 지 한달이 지나도록 엉치뼈가 아파 밤잠을 설쳤다. 돌이켜보니 폐암의 뼈전이 증상이었다”며 허탈해 했다.
폐암은 대부분 초기 증상이 없다. 폐암 환자의 70~80%가 3~4기에 이르러 진단되는 것도 폐암의 특성 탓이다.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는 저선량 폐 CT 대상도 30갑년 이상의 흡연력을 지닌 54~74세로 제한된다. 이씨 같은 비흡연자가 폐암을 조기에 발견할 가능성은 그만큼 낮다는 얘기다. 폐암은 암 진단 시점에 따라 예후가 크게 갈린다. 중앙암등록본부 통계에 따르면 암이 발생한 장기(폐)를 벗어나지 않은 국한 단계인 경우 폐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은 78.5%다. 반면 암세포가 주위 장기나 인접한 조직 혹은 림프절을 침범한 국소 진행 단계에는 48.4%, 멀리 떨어진 다른 부위로 번진 원격 전이 단계에는 12.1%까지 떨어진다.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돌연변이는 하위 변이의 종류가 다양합니다. 환자 분은 EGFR 중에서도 약이 잘 듣는 엑손(Exon)19 결손 변이로 확인됐습니다. 효과가 좋은 3세대 표적항암제 2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도 있어요.”
열흘에 걸친 방사선치료 후 내원한 이씨에게 여창동(사진) 은평성모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암을 좀 더 일찍 발견했다면 구세대 항암제를 사용해야 했을지 모른다”며 격려했다. 최신 약물인 3세대 표적항암제를 사용하면 암 진행을 2년 가까이 늦출 수 있으니 좌절하지 말고 치료에만 전념하라는 것. 이씨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건 “1년치 약값만 7000만 원 가까이 되던 항암제를 무상으로 처방받을 방법이 곧 마련된다”는 말이었다. 유한양행(000100)이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를 EGFR 돌연변이 양성 비소세포폐암 1차치료제로 허가 받은 직후 시행한 동정적사용프로그램(EAP)을 언급한 것이다. 이 씨는 그로부터 한달이 채 되지 않아 은평성모병원의 렉라자 EAP 1호 환자가 됐다.
여 교수에 따르면 이씨는 렉라자 첫 투약 6주 후 진행한 CT 검사에서 원발암의 크기가 약 30%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치료반응이 좋아 지금은 3개월에 한 번꼴로 추적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씨는 “아침저녁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먹어도 (엉치뼈가) 너무 아파 새벽에 자다 깨곤 했었다”며 “신통하게도 (렉라자를 복용한 지) 사흘만에 통증이 말끔히 사라져 단잠을 잤다”고 말했다. 발바닥이 뻣뻣하고 발가락이 둔해지는 느낌이 드 것 외에는 일상생활에 별다른 지장이 없다. 이씨는 총 5차례 EAP 적용을 받았다. 올 1월부터는 보험가로 약을 처방 받아 복용 중이다. 작년 7월부터 올 1월까지 이씨 같이 EAP를 통해 렉라자를 지원받아 복용한 환자는 900명에 육박한다. 여 교수는 “렉라자 같은 최신 항암제는 효과가 좋아서 1~2년간 치료반응이 지속된다. 투약 기간이 길어질수록 환자의 부담이 커지다 보니 의료진으로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며 “생사를 넘나드는 말기암 환자들의 신약 접근성을 높이는 데 정부 기관은 물론 신약개발 기업들도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