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을 볼 수 없잖아요. 제가 잘못된 말을 하거나 상대방이 제 말을 잘못 이해하면 어떡해요? 전화 상대가 이상하게 여겨도 전 알 수도 없어요.”
미국의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진 두려움증(?)이 있다. 바로 ‘전화 공포증’이다. 미국 텍사스주에서 일하는 직장인 라일리 영(26)은 전화를 기피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같이 토로했다. 그는 전화보다 이메일이나 채팅 메신저를 훨씬 선호한다. 이메일과 채팅 역시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더 효율적인 업무 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라일리씨뿐만이 아니다. 전화 공포증은 전화 문화에 더이상 익숙치 않은 전세계 신입 직장인들 사이에 확산돼 이들의 가장 큰 고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사들은 이른바 ‘전화 기피자’들을 향해 우려의 눈빛을 보낸다. 전화가 여전히 업무상 중요한 소통 방식인 데다 고객 응대에도 중요한 ‘스킬’이라는 점에서 “못한다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1:1 즉각적 상황 피하고 싶어요”…통화보다 ‘줌(Zoom)’이 더 편하다고?
전화 기피자들은 예상치 못한 전화에 공포를 느낀다. 이메일과 채팅이 아닌 전화가 기피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집중’되고 ‘즉각적’인 상황. 다시 말해 이들은 1대 1로 대비하지 않은 질문에 바로 답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생각을 정리한 다음 원하는 시기에 답을 할 수 있는 문자와 채팅 문화 속에서 자라난 40세 이하의 직장인들이 대게 전화 공포증에 시달린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오히려 영상 회의(줌 같은)를 선호한다. 영상 회의는 보통 예정돼 있어 대비할 수 있고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불안감을 덜 유발한다는 것이다. WSJ는 “사전 예고 없는 갑작스러운 전화는 단지 불편할 뿐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완전히 무례한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고 전했다.
미국인들은 확실히 전화보다 채팅과 친밀해지고 있다. 미국 무선통신산업협회(CITA)에 따르면 모바일 앱 데이터 트래픽이 2012년 1조 5000억메가바이트(MB)에서 2022년 73조 7000억MB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유선 전화 사용량은 급감했으며 음성 통화 사용량은 8.7% 늘어나는 데 그쳤다. 전화 기피증은 직장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퍼지고 있다. 미국 인구조사국이 올해 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3분의 2가 1주에 4번 이하로 가족, 친구, 이웃과 전화 통화를 한다고 답했다. 1주에 전화를 단 1통도 하지 않는 이들의 비중은 전체의 20%에 달했다.
“일 좀 못해도 전화 받는 직원이 낫다”…이해 못하는 이들도
다른 한쪽에는 전화 공포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장인들이 있다. 이들에게 전화란 손가락이 아픈 톡 메신저나 부담스러운 영상 회의 사이 최고의 선택지다. 멘탈케어 플랫폼 라이라헬스의 마케팅 부사장인 빌 콕스(51)는 업무 중 전화를 가장 선호하는 직장인 중 한 명이다. 그는 “나는 기술을 사랑하지만 화면에 32개의 얼굴들를 띄어놓고 있을 때나 채팅창 여러 개를 클릭할 때는 인지 과부하가 발생한다”며 “전화가 올 때면 ‘오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문자나 이메일을 먼저 보내지 않고 동료에게 업무 연락을 했다가 짜증을 듣고서 황당해진 이도 있다. 아파나 폴(41)은 “단지 2분간의 업무 통화를 위해 상대에게 사전 문자를 바라는 것은 너무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아니냐”고 불만을 표했다. 기술직 인력을 배치하는 기업을 운영하는 스콧 이스틴(56) 역시 전화를 기피하는 젊은 인력들과의 소통을 어려워하고 있다. 그는 “너무 많은 이들이 계약 기회를 제공하려는 내 전화를 무시한다”며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전화를 받는 사람이라면 하루종일이라도 일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전화를 통한 소통에 대한 선호도는 세대가 내려올수록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상대방이 누군지 알기 위해 전화를 받아야만 했던 유선 전화 문화를 경험하며 자란 이들은 예상치 못한 전화가 오더라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여론조사기관 유고브에 따르면 문자 메시지에 대한 선호도는 18~24세 사이에서 가장 높았고 25~34세가 그 뒤를 이었다. 채용컨설팅업체 로버트윌터스가 Z세대(1997~2012년생) 직장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오직 16%만이 전화가 ‘생산적인 형태의 소통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경험 부족’ 따른 불안…日 기업들은 ‘전화 응대 검정 시험’ 도입도
전화 공포증은 전세계 젊은 직장인들을 덮치고 있다. 지지닷컴에 따르면 일본 20~30대의 70% 이상이 전화 응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올 봄 입사한 한 여성 직장인(23)은 “전화는 생각하는 동시에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며 “글로 주고 받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문자나 채팅으로 연락을 받는 것이 더 좋다”고 털어놓았다. 금융기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한 남성 직장인(22) 역시 “하루에 10통 정도 전화를 받는데 한 번은 예상 외의 질문을 받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며 “입사 1개월이 지났을 때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전화를 받는 것이 무서웠다”고 말했다.
일본 신입 직장인들이 전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 역시 ‘경험 부족’이다. 문자나 채팅보다 전화를 많이 걸고 받으며 자라난 세대와 달리 ‘통화’라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저지를 실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인공지능(AI) 전화응답 서비스업체 소프트투가 지난해 20세 이상의 직장인 562명을 대상으로 전화에 거부감을 느끼는지를 설문한 결과 전체의 57.8%가 ‘그렇다’고 답했다. 2030의 경우 비율이 72.7%에 이른다. 다만 세대별로 거부감의 느끼는 이유가 달랐다. 4050의 경우 “하던 일을 멈추고 대응해야 해서 집중력이 떨어지고 업무 효율이 저하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20대의 경우 “알고 있는 사실을 알맞게 답할 수 있을지 불안해서(41.4%),” “상사에게 잘 보고할 수 있을지 불안해서(27.3%)” 등의 비율이 다른 연령층보다 높았다.
일본에서는 젊은 취직 준비생들이 전화 응대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일명 ‘전화 응대 검정 시험’을 도입하는 회사들이 늘고 있다. 올바른 통화 방법과 사용 언어에 대해 테스트하는 시험이다. 해당 시험을 도입한 업계는 보험사, 증권사, 제조사 등 다양하다. 전화 응대가 여전히 고객 대응의 최종 수단으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비즈니스 스킬’이라는 점에서다. 일본 통신업체인 일본전신전화사용자협회의 사토 유키마사 사업추진 부장은 “AI가 아무리 우수하다고 해도 고객으로서는 사람이 응대하는 것에 가장 안심한다”며 “전화 응대가 어떻게 이뤄지는가가 그 기업의 브랜드 가치와도 연결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