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 일차전지 제조업체 아리셀의 화재 사고를 계기로 지난해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이 위험물질 작업장의 비상구 설치 기준을 완화하도록 개정된 사실이 재조명되고 있다. 당초 개정 취지는 '국가핵심산업의 불합리한 규제 해소'였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생산성을 우선시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현재 아리셀은 불이 난 작업장에 출입구 외 비상구를 1개 이상 설치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돼 이 규칙을 위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7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해 11월 14일 공포된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 제17조(비상구의 설치)는 사업주 측 민원을 계기로 단서 조항이 붙게 됐다. 당초 규칙은 위험물질을 제조·취급하는 작업장 내 어떤 구역에서든 수평거리 50m마다 '비상구·출입구'가 있도록 했다. 하지만 개정이 되면서 건축법령에 따라 보행거리 75m 기준 '피난층으로 통하는 출입구나 직통계단'을 설치한 경우에도 이 기준을 충족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당시 사업주 협단체 등으로부터 규제 개선이 필요하다는 건의 사항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포 당시에도 고용노동부는 "반도체·건설·화학 등 업종별 ‘찾아가는 현장간담회’에서 안전기준과 관련한 애로사항을 청취했다"면서 안전보건규칙과 건축법령 상 비상구 설치 요건이 상이해 혼란이 발생하는 문제 상황을 해결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규칙 완화에 따라 "이중으로 시설을 개선하는데 드는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측 애로사항을 반영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현장 근로자 안전을 고려한 검토 절차는 부족했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류상일 동의대 소방방재행정학과 교수는 "아마 개정 과정에서 수평거리 50m와 보행거리 75m라는 상이한 조건 하에서 똑같은 대피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그런데 대피 관련 현행법들을 보면 안전보건규칙·건축법·유해화학물질 관리법·소방법 등에서 모두 다른 기준을 제시하는 데다 이를 통일시키는 과정에서도 (통일) 기준이 모호하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이어서 “설령 여러 안전 규정이 중복되더라도 더 안전하게 두는 편이 차라리 낫다. 자동차에도 풋브레이크 외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설치하는 데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꼬집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 역시 "수평거리(평면도상 직선거리)와 보행거리(실제 보행으로 이동한 거리)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고, 직통계단이 출입구를 대체할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며 "직통계단으로 나간다고 대피가 끝나는 게 아니다. 계단에 유독가스가 가득 차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이어서 "보행거리로 설치 기준을 지정한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건물 구조에 따라 보행거리 75m가 수평거리 50m보다 길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직통계단보다는 출입구까지의 거리로 기준을 정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24일 배터리 폭발 사고로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한 아리셀 역시 동일 규칙을 위반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발화가 시작한 아리셀 3동 2층 군 납품용 일차전지 검수·포장공정 작업장에 출입구 외에 비상구를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2020년에 38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치는 등의 대참사를 낳은 경기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화재’ 역시 이 규칙을 위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당시 사측은 화재 발생 위험 작업 현장이었음에도 지하 통로를 폐쇄한 데다 다른 대피로를 마련하는 등의 충분한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화재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초반 ‘골든 타임’에 대피로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인 만큼 관련 법을 손질할 때 안전 전문가의 적극적인 의견 청취를 전제로 하고 강제성도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류 교수는 “지금까지는 대피 관련 법을 입법·개정할 때 소방방재 학계 측에 자문을 구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 “위험 물질 작업장의 경우 건축가를 넘어 안전 전문가들도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또한 공 교수는 "최근 기업의 고충을 덜어주고자 규제 완화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지만, 최소한 안전에 대해서는 타협하기 이른 시점이다"라고 꼬집고 "궁극적인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라도 안전 부문 규정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너무 사업주의 편리성만 고려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