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4일 단행한 조직 개편의 핵심은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으로 정리할 수 있다. 조직 전반에 퍼진 중복 기능을 하나로 합쳐 군살을 제거하는 동시에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비교 열위 사업을 전담하는 개발팀을 신설해 투자를 집중한다는 점에서다. 삼성전자는 2019년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는 당시 경영진의 판단 아래 HBM 전담팀을 없앴다가 SK하이닉스에 역전을 허용당한 뼈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HBM 개발팀을 이끌게 된 손영수 부사장은 2021년 47세의 나이에 부사장 자리에 발탁된 인물로 D램 설계 및 상품 기획 전문가로 꼽힌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HBM의 경우 상품 발주 단계부터 고객사와 함께 제품 디자인을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D램에 대한 이해와 기획 능력이 모두 중요하다”며 “이 같은 측면에서 인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출신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삼성 디바이스솔루션(DS) 사업부에서 포항공대 박사 출신인 손 부사장이 최선단 사업팀장에 임명돼 일종의 ‘메기’ 역할을 맡은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삼성전자 D램 개발 조직에서 에이스로 꼽히는 인재들이 수백 명가량 모이는 조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술에 대한 이해와 강력한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삼성 내부에서 차세대 반도체 생산 기술을 연구하는 설비기술연구소를 사실상 해체한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동안 삼성전자에서는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하는 반도체연구소와 생산 장비와 공정을 주로 연구하는 설비기술연구소가 연구개발(R&D)의 양대 축 역할을 맡아왔다. 하지만 반도체 공정의 난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연구소를 따로 두는 것보다 기능을 하나로 합쳐 효율성을 높이는 게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 나왔다고 한다. 특히 기술적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전영현 부회장이 DS 부문을 이끌게 되면서 업무 효율성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조직 개편이 확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설비기술연구소 개편과 별도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2㎚(나노미터·10억분의1미터) 이하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과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적용 D램 등 차세대 공정에 대한 기술 개발은 계속 이어간다. 이 같은 공정에 대한 연구는 반도체연구소 산하 차세대공정개발실이 지속적으로 담당할 것으로 전해졌다.
미래 반도체 산업에서 ‘급소’로 꼽히는 첨단패키징(AVP) 사업에서도 개편이 이뤄졌다. AVP사업팀이 AVP개발팀으로 재편되고 이 팀 산하에 HBM과 관련한 패키징 연구팀이 모두 집결할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는 회로 폭을 미세화하는 공정 고도화 경쟁이 한계에 이르자 패키징 경쟁으로 전장이 옮겨가고 있다. 패키징은 한마디로 칩을 쌓고 조립하는 기술로 D램을 수직으로 쌓는 HBM에서 패키징 기술의 경쟁력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다시 한 번 입증됐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6세대 HBM(HBM4)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 제품부터는 현재 2.5D 패키징 기술에서 한 차원 더 진화한 3D 패키징 기술이 필요하다. 이는 기존에 평면으로 놓여 있던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의 배치 방식을 수직으로 변형하는 기술이다.
이 같은 공정 적용을 위해 SK하이닉스가 대만 TSMC와 손을 잡은 상태이고 삼성전자는 독자 기술로 대항해야 한다. 반도체 장비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강점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결국 패키징 기술에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며 “AVP개발팀에도 집중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다만 업계에서는 AVP개발팀이 전 부회장 직속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사업팀→개발팀’으로 더 조직이 축소되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일부 나오고 있다.
이번 조직 개편에서는 별도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삼성 비장의 무기인 인공지능(AI) 가속기 ‘마하1’의 후속작 역시 시장의 관심을 받고 있다. 마하1은 HBM을 연결하지 않고도 연산 및 추론이 가능한 삼성의 차세대 칩이다. HBM과 마하 시리즈를 앞세워 AI 칩 시장에서 주도권을 쥔다는 게 삼성의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