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중한 가짜노동에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어요.”
성과 없이 일했다는 느낌만 주는 노동의 허위를 지적한 저작 ‘가짜 노동’의 저자 데니스 뇌르마르크가 한국 사회에 남긴 새로운 자각이다. ‘가짜 노동’은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10만부 가까이 판매되며 한 동안 독자들이 찾지 않던 인문서 분야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덴마크의 인류학자이자 조직 컨설팅 전문가인 뇌르마르크는 후속작인 ‘진짜 노동(자음과모음 펴냄)’을 내고 우리나라를 찾았다. 그는 우리나라에서의 인기 원인을 알기 위해 노동 제도, 사회적 구조 등에 대해 여러 매체를 통해 꼼꼼히 공부했다.
1일 서울 중구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한국의 경우 관리자와 직원 간 신뢰도가 낮아 무작정 사무실에 오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큰 것이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가짜 노동’은 결론을 내지 않는 회의, 사소한 의문에 답하기 위한 긴 보고서, 보고서를 둘러싼 맞춤법, 서식 지적 등이다.
많은 이들의 첫 질문은 “덴마크는 노동 시간이 짧은데도 가짜 노동 문제가 심각하느냐”로 모였다. 평균 주당 37시간을 일하고 기본 유급 휴가가 5주 이상 주어지는 덴마크다 보니 근로자에게는 자유도가 높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2018년에 책이 처음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매니저들 입장에서도 그렇고요. 많은 논쟁거리와 토론을 일으켰죠. 하지만 덴마크에서 스트레스 문제도 커지고 있기 때문에 맞는 일, 정확한 일을 노동자에게 준다면 일의 효율도 늘어나고 개인이 생각하는 가치도 커질 수밖에 없고요.”
다음은 일문일답
- 한국은 노동시간이 깁니다. 한국에서 덴마크의 모델을 저희가 가야할 목표로 생각하는데 덴마크에도 가짜 노동이 큰 문제라니 의외입니다.
= 한국은 시간당 생산성이 매우 낮죠. 역설적으로 ‘가짜 노동’을 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습니다. 다만 한국인들은 예의를 지키고 갈등을 피하는 데 반해 덴마크는 조금 더 공격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갈등이 되는 주제를 피하려 하지 않죠. 아마 덴마크가 매니저와 직원 사이에 신뢰도가 더 높고 소규모의 기업의 많은 게 원인이 될 수도 있어요. 워라밸 관련해서도 매니저 입장에서는 근로자가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해 이를 조정해주려는 경우가 많아요. 정해진 시간 내에 끝내려고 하고 오후 7시 이후까지 남아있다면 흐뭇해하는 게 아니라 슬프게 생각합니다.
- 변화가 일어나려면 어떠한 방식이 필요할까요.
= 사실 매니저들은 직원들이 얼마나 오래 앉아있는가에 대해 관심이 없고 없어야 합니다. 대신 대화가 잘 이뤄져야 하죠. 직원들은 쓸모 없는 일이나 시간 낭비인 일에 대해서는 가감 없이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고서나 문서 등에서) 스펠링 오류를 바로잡거나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비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 실제 사례가 있을까요.
= 덴마크의 한 기업에서 익명으로 가짜노동이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지 직원들과 매니저가 나눠서 이를 적어봤어요. 매니저가 처음으로 직원들 입장에서의 ‘가짜 노동’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된 것이죠. (그가 언급하는 매니저는 우리나라의 직책으로는 팀장급 이상의 관리자를 의미한다.) 저도 덴마크 미디어 기업에서 일하는데 관리자 역할을 합니다. (뇌르마르크 저자는 덴마크의 라디오 방송국인 DR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다.) 어느 날은 직원에게 질문을 했는데 3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로 그에 대한 답을 받은 적이 있었죠. 당황스러웠죠. 10분 정도의 대화면 충분한데. 앞으로는 전화 한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그렇게 하자고 제안했죠.
-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직원 입장에서 ‘비효율적이다’ ‘시간 낭비다’ 등 윗사람이 지시한 일에 대해서 아랫사람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 말을 하기 어렵습니다. 태도 평가에서 일을 안 하려는 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도 하고요.
= 매니저든 근로자든 누군가는 신뢰를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매니저가 신뢰를 보여준다면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를 하는 것부터 없애야 하죠. 그러면 직원 입장에서도 ‘나를 신뢰하는구나’ 생각할 거예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근로자에 대한 존중이 높은 편이에요. 매니저들이 상대적으로 겸손해요. ‘내가 모르기 때문에 당신을 고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에 대해서도 평등하다는 전제를 둬요. 그렇다 보니 신뢰 역시 높은 편이죠.
- 팬데믹 이후에 재택근무를 많이 하다 보니 오히려 일을 하는 지 점검하기 위한 회의가 늘어났다는 하소연들이 많습니다.
= 덴마크에서는 반대에요.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를 하면서 더 적은 시간 일하면서도 주어진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있다는 것을 관리자들도 깨닫고 있어요. 상대적으로 신뢰가 많이 쌓여 있는 덴마크 근로환경이라 가능한 것 같아요. 책에 소개된 사례에서도 한 병원의 운영 사례가 있었는데 관리자의 관리라든가, 행정절차가 생략되면서 필수적인 일만 하니까 효율적이라는 시각이 커졌어요. 아마 관리자들의 층층시하는 줄어들 거예요. 직원들의 교육도는 높아지면서 관리의 필요성은 더 떨어지겠죠. 덴마크에서는 관리자들이 괴롭힐 사람을 덜 찾으면서 지루해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어요. 1만5000명이나 고용하는 사업장에서 단 두 명의 관리자가 전체를 관리해요. 매니저의 관리가 줄어드는 것이 유럽에서는 새로운 경향입니다.
- 사실 한국인들이 긴 시간 노동에 매여 있는 데는 저녁에 늘어난 시간을 제대로 보낼 자신이 없는 것도 원인이 되는 것 같아요. 가짜 노동이 사라지면 남는 시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늘어난 시간을 제대로 보낼 자신이 없다기 보다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잊은 것은 아닐까요. 남는 시간 할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하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 세대는 일을 ‘추앙’했어요. 하지만 여러분 세대는 다르고 달라야 합니다.
- 한국의 저출생 문제도 만성화된 가짜노동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나요.
= 저는 4명의 아이를 키우면서도 최고의 ‘워라밸’을 갖고 있어요. (그는 작가이자 미디어 회사 부회장이자 평론가로 일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주 69시간을 일하라고 하면서 한쪽에서는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게 상충될 수밖에 없겠죠. 부연하자면 덴마크의 한 패스트푸드점의 경우 가짜 노동이 전체의 20%를 차지하는 것을 알게 됐고 주4일을 도입했는데도 오히려 생산성이 더 높아졌어요. 금기시 되는 것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절대 ‘시간=생산성’ 공식이 맞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꾸준히 발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