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 더 독해질 '아메리카 퍼스트'

정민정 국제부장

바이든 토론 참패에 '트럼프2.0' 가시화

블루칼라서 중산층으로 확장한 트럼피즘

대미 수출 급증에 통상 압박도 커질 것

한미간 경제·안보·기술 동맹 끌어올려야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선셋 파크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유세하고 있다. 이날 트럼프는 경쟁자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발표한 국경 정책 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EPA연합뉴스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선셋 파크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유세하고 있다. 이날 트럼프는 경쟁자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발표한 국경 정책 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EPA연합뉴스




지난해 9월 올리버 앤서니라는 무명 가수가 부른 컨트리송 ‘리치 멘 노스 오브 리치먼드(Rich Men North of Richmond·리치먼드 북쪽 부자들)’에 미국 전역이 들썩였다. ‘하루 종일 영혼을 팔며 일하고(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형편없는 급여를 받으며 초과 근무했다(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는 가사에 담긴 서민의 고단한 삶과 정치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고교 중퇴 뒤 일용직을 전전했다는 앤서니의 절절한 인생 스토리까지 더해지며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핫 100에서 1위에 올랐다.

‘리치먼드 북쪽’은 미국 워싱턴DC를 지칭한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모여 있다. 4개월 뒤 리치먼드 북쪽 사람들도 변화를 맞는다. 11월 5일 대통령 선거, 6년 임기의 연방 상원의원 100석 중 34석, 2년 임기의 연방 하원의원 435석 전원에 대한 선거가 동시에 치러진다. 4년 만에 다시 맞붙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리턴매치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당장은 바이든 대통령의 TV 토론 참패로 후보 교체론까지 나오며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가 높게 점쳐지고 있다. 공화당은 최근 보편 관세, 힘을 통한 평화, 국경 봉쇄 등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집대성한 정강 정책을 공식화했다. 일명 ‘트럼프표 강령’을 관통하는 대원칙은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다. 강령은 “미국의 역사는 미국을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용감한 남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미국 예찬’으로 시작한다. 이어 “지금은 심각한 쇠퇴의 길로 접어든 국가”라며 미국을 위태롭게 만든 건 민주당 정권이라고 직격한다. “수십 년간 불공정한 무역 협상과 세계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우리의 일자리와 생계를 해외 입찰자들에게 팔아넘겼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트럼피즘(Trumpism)’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뉴욕타임스는 2016년 대선 때보다 “더 국수주의적이고 보호주의적”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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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후보 교체 요구를 받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멜론 대강당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창설 75주년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거센 후보 교체 요구를 받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멜론 대강당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창설 75주년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1기 때만 해도 미국 중서부·남부 지역 저소득 백인 노동자들을 트럼피즘의 지지 기반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2020년 대선 출구 조사 분석 자료를 보면 트럼프를 선택한 유권자의 평균 소득이 전체 유권자의 평균 소득을 웃돈다. 트럼프 지지 세력이 시골에 사는 저학력 노동자뿐만 아니라 ‘(미국인으로서) 더 나은 삶’을 갈망하는 전문직 등 화이트칼라로 확장한 것이다.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인 유색인종 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히스패닉, 인도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트럼프 지지는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흑인과 아시아 커뮤니티에서도 3분의 1 가까이가 트럼프의 정책을 다양한 이유로 지지하고 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양극화가 고착화하면서 빈곤층뿐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중산층까지 트럼피즘으로 흡수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여기에다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으로 각종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서민들의 불만이 트럼피즘에 투영됐다는 분석이다. 미국 UC버클리대에서 교환교수를 지내고 돌아온 지인의 말을 빌면, 진보 진영에 속했던 대학원생들조차 고물가로 생활이 팍팍해지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내건 트럼프의 구호에 열광한다. 이런 배경에서 트럼피즘을 일시적 현상이 아닌 미국 사회 내 변화의 주된 흐름으로 이해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학계에서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민주당이 재집권하더라도 이런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얘기다.

현시점 우세를 점하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기든, 바이든 대통령이 역전에 성공하든 대한민국이 맞닥뜨릴 현실은 ‘더 세고, 독해진 미국 우선주의’다. ‘하루 종일 영혼을 팔며 일하고, 형편없는 급여를 받으며 초과 근무를 하고 있는’ 서민의 분노에 직면한 리치먼드 북쪽 부자들이 화살을 나라 밖으로 돌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역대 최대인 444억 달러의 대미 무역 흑자를 거뒀고, 올 상반기 대미 수출 규모는 역대 최대치를 새로 썼다. 통상 압력은 거세지고, 방위비 압박 역시 커질 것이다.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낼 방패를 마련하기에 미 대선까지 남은 4개월은 턱없이 부족하다. 누가 승리하든 우리는 한미 동맹을 전통적인 군사·안보를 넘어 반도체·인공지능(AI)·원전 등을 망라하는 경제 기술 동맹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바이든·트럼프 후보 측의 모든 채널을 풀가동해 사전 정지 작업에 나서야 한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민과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야가 따로 없고, 내 편과 네 편이 있을 수 없다.

정민정 국제부장정민정 국제부장


정민정 국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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