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IN 사외칼럼

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1회>


김다은 작가는 첫 소설작품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습니다. 이후 장편소설 ‘바르샤바의 열한 번째 의자’ ‘금지된 정원’ ‘모반의 연애편지’ ‘훈민정음의 비밀’, 창작집 ‘쥐식인 블루스’ ‘위험한 상상’ 등을 비롯해 문화칼럼집 ‘발칙한 신조어와 문화현상’ ‘너는 무엇을 하면 가장 행복하니’, 서간집 ‘작가들의 연애편지’ ‘작가들의 우정편지’, 문학이론서 ‘영감의 글쓰기’ 등을 출간했습니다. 다수의 작품이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됐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 청송 객주 문학관의 작가 레지던시, 그리고 정선 여량면에서 주최한 아우라지 작가 레지던시 문학관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와 불어불문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 프롤로그

이 소설은 자신이 겪은 가장 치욕스러운 일을 통해 구원받은 이야기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잊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치욕을 아직 치워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 그 감정이 여전히 남아 울컥 마음의 밑바닥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떨쳐 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쁜 꿈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치욕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지, 반대로 삶의 영예처럼 여겼던 일이 나를 어떻게 롤러코스터처럼 솟구치게 했다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내동댕이쳤는지를 전하고 싶다. 내가 느꼈던 치욕도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명예로운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1.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국제예술창작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김아리랑 팀장이라고 했다.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는 단번에 그녀를 기억해 냈다. 그녀가 강하게 각인된 이유는 ‘아리랑’이라는 독특한 이름과 언젠가 한 대사관 파티에서의 과한 술주정이 매우 천진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껏 멋을 내고 도도하게 잘난 척하는 무리 속에서 마치 술에 취한 시골 아낙처럼 혀 꼬인 소리로 사람들을 쥐락펴락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프랑스 대사관 행사에 단골로 오는 약간 귀여운 주정뱅이 정도로 알았는 데, 그녀는 국제예술창작재단의 유럽지역 문학 담당자였다. 사람에 관한 인상이나 추측이 그렇게 빗나간 적이 살면서 처음이었다. 아마 그 빗나감이 내가 겪을 사건의 전조였던 모양이다.

그 귀여운 술주정뱅이가 아니었으면, 사람의 마음을 턱 놓게 만드는 그녀의 대화술이 아니었으면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경계심 없이 그쪽의 용건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 도서전에서 프랑스 작가와의 대담을 기획했는데, 한국인 대담자가 코로나에 감염되어 갑자기 격리되었다 했다. 행사가 3일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긴급전화라 했다. 대담의 논제가 될 프랑스 작가의 작품은 한국에 막 번역 출간된 『인공낙원의 문』이라 했다.

책을 구해 읽을 시간이 충분치 않다거나 코로나 2차 접종을 앞둔 사실을 말하기 직전에, 아리랑 씨는 “지금 상황에서 이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 당신입니다”라고 말했다. 귀여운 주정뱅이에게서 정중한 부탁을 받자, 언어 마법에 걸렸던 모양이다. 환각에서 깨듯 정신을 차리고 나니 승낙한 후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결정이 묘하게 미심쩍었다. 자주적인 결정이었다고 합리화하기 위해, 내심 독서가 뜸해진 시기에 책이나 읽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녀의 화술에 넘어가 무심코 한 결정은 아리랑 고갯길이 아니라, 이렇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게 만든 것이다.

책을 구하는 데 시간을 잃지 않도록 재단 측에서 『인공낙원의 문』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막 출간된 따끈한 책을 펼치고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은 진지하게 독서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책 커버의 문구가 눈에 띄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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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문구에는 작가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담는다. 값을 주고 누가 누구를 샀단 말인가. 인간을 값을 주고 샀다면 그것은 고대 시대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값을 주고 샀으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문장은 매우 모순적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비틀어 쓴 반어법에 지나지 않았다. 『종의 기원』이 생물학적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을 의미하고, 사람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러기에는 표지 문구에 자유의 본질을 상징하는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대담의 첫 질문으로 이 모순적인 문장을 건드리기 위해 메모장에 적었다. 소설류는 이래서 읽을 가치가 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 읽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 아예 첫 번째 독서로 세계적인 작가와의 대담에 걸맞은 질문들을 뽑아내야 했다.

장편 소설 『인공낙원의 문』의 배경은 세계지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특정 나라가 아니었다. 도입부에 묘사된 소설 시공간이 살아있는 시체들의 도시처럼 보여서 좀비 이야기인가 싶었다. 그런데 ‘인공낙원’은 마약의 환각에 의해 들어갈 수 있는 미지 세계의 기괴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좀비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고 아무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은 마약 제조자들이었다. ‘모르’라는 이름의 마약은 사람의 뼛가루가 들어가야만 효능이 있어서, 그들은 인간의 뼈를 구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했다. 몰래 무덤을 파내고 덮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갈수록 대담해진 일당은 무덤을 파고 덮는 번잡하고 위험한 과정을 생략하고 싶어졌다. 돈을 주고 장의사(葬儀社)에게서 뼈를 빼돌리기로 했다. 교통사고로 몸이 손상된 사체의 뼈들이 가장 안전한 상품이었다. 장의사가 뼈를 빼돌려 악당들에게 넘겨주거나 묘지로 이동하기 전에 필요한 부위의 뼈를 적출하기로 했다.

그날도 교통사고로 죽은 한 여인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몰래 관을 열었다. 일당은 소스라쳤다. 죽은 여자만 들어 있어야 하는 관 안에 갓난아기가 탯줄도 끊지 못한 채 어머니의 몸에 매달려 있었다. 어찌 임신한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입관했는지 경악스러웠다. 분명 의사가 여자의 죽음을 확인했고, 장의사도 여자의 죽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죽은 후에 아이가 출생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가 죽은 엄마의 몸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여자의 사망을 선고한 가짜 의사에게 생명을 경원시한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한동안 떠들다가, 악당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풀이 죽었다. 여자의 시체를 빼돌린 브로커도 경찰에 넘겨야 한다고 떠들다가 잠잠해졌다. 어머니의 몸에서 죽은 후에 분만된 사산아는 사체 유기죄의 사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일당의 우두머리가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일당은, 가족도 없고,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여자인 것 같으니,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다.

소설 도입부를 읽을 때 만해도, 나는 기존 좀비와 전혀 다른, 즉 죽어서 돌아다니는 좀비가 아니라, 마약 때문에 살아도 죽어 있는 사람들의 도시를 설정한 것에 신선함을 느꼈다. 치밀하게 직조된 악의 그물망을 따라 읽을 때만 해도, 작가의 문학적인 재능에도 조금 감탄이 되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독자를 건드리기 위해 작가가 놓은 교묘한 덫을 발견하고는 기분이 나빠졌다. 여자의 뼈는 빼돌린다 해도 아이를 어찌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부분부터였다. 일당은 아무렇지 않게 아이까지 데려가자는 결론을 내린다. 한 사람의 돈으로 두 사람의 뼈를 가지게 된 것이 이득이라고까지 했다.

나는 갑자기 작가가 놓은 덫이 너무 허술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작가와의 대담에서 흔히 하는 질문들은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 혹은 영감을 어디서 얻었느냐 등 정해진 루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죄의식 없는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고 싶어졌다. 이 질문을 뽑으면서, 나는 스스로 당혹스러워졌다. 도덕이 선에 관한 윤리라면, 문학은 인간의 갈등과 악에 관한 철학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악한 주인공을 선호한다고 해서 탓할 일은 아니다. 문학은 그런 악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재판장이 왜 살인했느냐고 묻자, 주인공 뫼르쏘는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라고 자신을 변론한다. 그 소설은 세계적인 작품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런데, 악당 중의 한 명이 갑작스럽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는 처음에 모자(母子)의 관을 도로 덮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지만, 갑자기 무슨 쇼냐는 일당의 면박을 받는다. 그는 다시 도덕심에 호소했고, 동료들은 요즘 벌이가 좀 괜찮아지니 배가 부르냐고 콧방귀를 뀐다. 그는 망설이다가 받았던 돈을 땅에 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동료들은 이 배반자를 잡아 족치고 싶었지만, 너무 빨리 달려 가버렸다. 그는 그들 중에 유일하게 딸아이가 있는 아버지였고, 그들은 그를 조금 이해하기로 했다. 단지 괘씸죄로 한 달간 일할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먼저 탯줄을 끊고 아기를 옮기기로 한다. 그러다가, 다들 경악한 표정으로 관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나도 문장을 읽다가 ……소스라쳤다.

여자의 다리 아래쪽에서, 염소 새끼처럼 아이는 아주 미묘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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