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과 북중러가 모두 모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우리 정부는 북러 군사협력을 규탄하고 국제사회의 단합된 대응을 촉구했다. 북한과 러시아는 자신들이 맺은 군사조약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미국이 오히려 인도 태평양 지역에서 동맹국을 끌어들이며 군사적 대립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는 등 강하게 맞섰다. 이 와중에 중국은 한국이나 북러 중 한 쪽에 가까운 견해를 표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면전서 북러 협력 맹비판한 정부...중국은 중립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27일(현지시간) 라오스 비엔티안 국립컨벤션센터에서 개최한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및 ARF 외교장관회의에서 북한의 최근 도발과 러·북 밀착을 비판했다. 조 장관은 EAS와 ARF 회원국들이 북한의 도발 중단과 완전한 비핵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발신해야 한다며 지지를 요청했다. ARF는 북한이 참여하고 있는 유일한 다자 안보 협의체다. 아세안 10개국과 한미일 3국, 중국, 러시아 등 총 27개국이 함께하고 있다.
지난 25일 라오스에 도착한 조 장관은 27일까지 이어진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에서 북러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 조 장관은 ARF 개최에 앞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도 북러 군사협력을 비판하며 “비핵화만이 북한의 유일한 선택지라는 단호하고 단합된 메시지를 EAS 회원국들이 분명하게 발신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AS는 2005년 출범한 역내 주요국 정상들 간의 전략적 협의체로서 아세안 회원국들을 비롯해 우리나라와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이 참가하고 있다.
특히 조 장관은 EAS 직후 라브로프 외무장관과 취임 후 처음으로 약식 회담을 가진 자리에서도 ‘북러 군사협력 강화에 대한 우리의 엄중한 입장’을 전달했다.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이날 “라브로프 장관뿐 아니라 (러시아는 그간)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지 않았다고 말해왔다”며 “(북러 간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 체결도) 방어적인 것이지 공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공개적인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이 고위당국자는 “(러시아는) 전반적으로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하고 있는 여러 가지 군사적인 위협적인 움직임에 대해 총체적으로 비판했다”라며 “북한도 그와 유사한 얘기를 했다”라고 말했다.
중국은 EAS·ARF 등 회의에서 한국이나 북러 중 한 쪽의 입장을 두둔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에 참석한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중국은 평화·안정을 위해서 건설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미지로 비치도록 노력하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은 지난 6월 북·러의 조약 체결 등 밀착을 달갑지 여기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한국과는 고위급 소통 및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 5월 한·중 외교장관 회담 이후 두 달 사이에 고위급 교류가 5번 있었다”라며 “중국이 한·중 관계 관리에 분명한 태도 변화가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이어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환경 변화와 중국 내 문제 등을 고려해 한국과 관계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라며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하려는 점도 연동돼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정작 ARF 결과 문서인 의장성명에는 북러 규탄 문구가 빠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 고위 당국자는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의장성명에 북러 군사협력이 반영될 가능성이 적다”면서도 “좀 두고 보겠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당국자는 “모든 성명에는 당사국의 입장을 균형있게 반영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understanding)가 있다”면서 “북러 군사협력은 비판받는 당사국 간 협력에 관한 문제라 반대가 심할 것이고 이를 신경쓰는 나라도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ARF에서 러시아와 북한의 더 강한 발언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번 ARF는 북러 간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하고 상호 군사·경제 협력을 강화키로 한 가운데 열려 지역·국제 정세 측면에서 필연적으로 다루게 됐고, 우리 정부는 의장성명에 북한 비핵화에 대한 분명한 원칙은 물론 북러 밀착을 견제하는 문구를 넣기 위한 외교전을 적극 펴왔다.
◇결국 불참한 최선희 北외무상...대참한 라오스대는 ‘한국 무시’
한편 관심을 모았던 최선희 북한 외무상은 ARF에 결국 불참했다. ARF는 북한이 참여하고 있는 유일한 다자안보 협의체이지만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고 난 뒤로 외무상 대신 주재국 대사나 주아세안대표부 대사를 수석대표로 보내왔다. 북러 밀착에 따른 국제사회의 규탄 움직임에 더해 최근 뜨뜻미지근한 북중관계 영향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최 외무상 대신 수석대표로 참석한 리영철 주라오스 북한 대사는 한국 취재진의 질문 공세에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외면했다. 친근하게 말을 건넨 조태열 외교장관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 장관은 리 대사의 행동을 두고 “돌아보지도 않아 민망했다”고 최근 북한의 적대적 대남 기조에 따라 남측과 만나더라도 ‘어떤 대응도 하지 마라’는 지침을 내렸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 장관과 리 대사는 26일 의장국 주최 갈라 만찬장에서 만났다. 취재진에 포착된 사진을 보면 조 장관은 이 대사에게 직접 다가가 팔을 만지며 말을 걸었지만 이 대사는 뒷짐을 지고 조 장관을 무시했다. 이와 관련해 조 장관은 “(만찬장에서) 이영철 대사를 보고 자리를 옮겨서 다가가 건드리면서 ‘인사합시다’ 했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빳빳이 서 있더라”며 “저는 민망해서 그냥 돌아서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발을 중단하고 대화에 복귀하라는 말을 하려고 다가갔는데 악수조차 안 됐다”며 “반응이 없는 사람을 붙잡고 매달릴 수는 없지 않나. 무슨 반응이 있어야 대화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리 대사의 행동을 두고 북한 수뇌부의 별도 지시가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 남북한은 국제 회의에서 만나면 짤막한 대화를 나누거나 적어도 서로 마주보기는 했기 때문이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 외교관은 남북 관계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며 “지금 남북 관계가 극도로 안 좋으니까 평양에서 ‘(남측에) 대응하지 말라’는 지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외무상의 불참을 두고도 말이 나온다. ARF를 앞두고 외교가에선 북한이 러시아와 밀착을 통해 얻은 외교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표적인 친북 국가인 라오스에 최선희 외무상을 파견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결국 최 외무상 대신 현지 라오스 대사가 참석한 데 대해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계속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고 즐거울 것 같지 않다”며 “와봤자 편하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오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북러 밀착을 두고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이날 ARF 본회의장에서 이 대사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다른 참가국 대표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내내 홀로 앉아 소외된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