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 AI 주권의 시대 그리고 '라인야후 사태'

김경훈 디지털편집부장





“어머니, 여기 봉이야 한 명 찾았습니다. 어우, 신기한데요!”



2015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tvN에서 방영돼 많은 사람의 아련한 추억을 소환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호돌이 티셔츠를 입고 1회 중반 처음 등장한 정균이네 첫째 정봉이는 빨간색 벽돌 두께에 버금가는 전화번호부를 탐독하다 이렇게 말한다.

초고속인터넷망이 깔리기 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동네에 신장개업한 중국집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맛볼라치면 꼭 필요했던 바로 그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일이 아직도 일상인 나라가 있다. 손꼽히는 경제대국이지만 ‘정보기술(IT) 산업의 갈라파고스’로 불리는 나라. 바로 일본이다.

밥을 먹거나 물건을 살 때 현금 사용이 카드 결제보다 익숙했고 개인의 일상과 정부 업무에서도 팩스와 도장을 통한 일 처리가 훨씬 효율적이었다. 코로나19가 열도를 덮치자 ‘디지털 패전’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재난지원금 수령 신청은 직접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는 것이 온라인보다 훨씬 빨랐다. 백신 접종과 감염 정보 공유 등 정부의 온라인시스템은 먹통인 날이 더 많았다.

오픈AI가 만든 챗GPT를 필두로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인류의 삶 속으로 훅 들어온 지금 일본은 바뀌고 있다. 자국산 생성형 AI와 슈퍼컴퓨터를 예고하면서 반도체 원판(웨이퍼) 등 각종 소재와 부품·장비에서부터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생산 거점 확보에 이르기까지 AI 생태계 구축을 넘어 ‘AI 주권’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AI 주권은 자국, 자체 인프라, 데이터, 인력 및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사용해 지역 언어와 문화 및 가치관 등을 반영한 대규모언어모델(LLM)을 기반으로 구축한 AI 서비스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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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미국 기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약 725억 엔(약 6200억 원)의 자금을 기업들에 지원하고 엔비디아와 협력해 자국 언어 특화 LLM 개발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더는 지지 않겠다는 일본의 의지를 읽은 빅테크들은 앞다퉈 일본으로 몰려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올 4월 클라우드 컴퓨팅과 AI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앞으로 2년간 일본에 29억 달러(4조 원)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아마존은 이보다 앞선 올 1월 발표를 통해 2027년까지 2조 2600억 엔(약 20조 2200억 원)을 쏟아붓겠다고 했다. AI 기술의 발달로 데이터센터가 이른바 ‘데이터 주권’의 허브로 떠오르자 각국이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을 이유로 자국 데이터를 역내에 저장하라며 클라우드 업계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데이터센터를 두겠다고 고집하던 구글과 메타의 사업 방향도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AI 생태계에서 데이터센터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축이다. AI 기술과 그 기술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서비스는 모두 데이터를 바탕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AI 시대의 ‘새로운 원유’로 불리며 동력이자 부의 원천으로 떠오른 이유다.

일본 정부가 네이버 지분 조정을 요구하면서 촉발된 ‘라인야후 사태’는 바로 이런 흐름 속에서 일어났다. 네이버는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더할 나위 없는 빌미를 줬다. 여기에 국민들이 무엇을 사고 누구와 거래하는지 모든 데이터가 몽땅 라인에 있는 상황에서 AI 주권의 첫 단계인 데이터 주권조차 확보하지 못했다는 일본의 초조함과 절박함이 절묘하게 겹쳤다.

이런 배경을 두고 이토 히로부미의 후손이 이번 사태를 주도하고 있다는 지적과 일본에 항의하기 위해 독도를 찾겠다는 ‘반일 감정 건드리기’ 프레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애초에 없었다.

미래 사회 경쟁력, 나아가 생존에 직결되는 AI 주권을 향한 국가 간 전쟁은 막이 올랐다. ‘머니게임’으로 흐르고 있는 이 전쟁에서 미국과 우리의 투자 규모 차이는 1000배가 넘는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언제 수면 위로 올라올지 모를 ‘라인야후 사태 시즌2’를 미리 걱정하며 ‘제2의 노재팬’을 외칠까 말까를 고민할 게 아니라 AI 생태계 구축에서 한국이 한참 뒤처져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 싸움에 뛰어드는 것이다.

AI 시대, 주먹 쥐고 결연한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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