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진행되는 인공지능(AI) 혁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일까. 얼마 전 만난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비싸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한 마디로 AI 산업을 정의했다.
당장 AI라는 금맥을 캐내는 곡괭이에 비유되는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의 경우 한 개당 가격이 5만 달러 안팎에 이른다. 그런데도 메타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한 해 수십조 원을 들여 수십만 개씩 물량을 싹쓸이 하는 바람에 물량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AI 구현에 반드시 필요한 반도체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불어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팹(공장) 하나를 짓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20조원"이라며 "정부 보조금 없이는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이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하면서 내세운 시설투자 계획이 5년간 4400억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비용 천장'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실감할 수 있다.
비용 압력이 이렇게 크다보니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한때 반도체 시장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인텔이 대표적 사례다. 인텔은 최근 실적발표회에서 직원 15%를 줄이고 주주 배당도 아예 중단한다고 밝혔다. 구조조정이야 흔한 일이지만 주주의 이익을 목숨처럼 여기는 미국에서 배당 중단은 심상치 않은 신호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문에 대한 무리한 투자가 회사를 짓누르고 있다는 게 재계의 진단이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같은 국내 기업들에게도 비용 절벽이 다가오고 있다. 실제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다음번 반도체 경기 다운턴 때 삼성전자가 회사채 발행에 나설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삼성이 보유한 100조원 현금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투자의 차원’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구조적 문제는 결국 기업 스스로가 체급을 키워 이겨내야 한다. 투자자를 빨아들이고 시총을 더 키워야 더 많은 돈을 더 싼 금리로 전세계에서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1위 삼성전자 시총(475조원)이 TSMC 시총(약 1120조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우리 기업들의 최대 리스크다. 물론 기업들 역시 다양한 주주친화정책으로 주가 상승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고질적인 투자자 신뢰 부족 현상 등을 감안하면 밸류업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차를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이다. 첨단산업에 대한 강력한 보조금, 규제 해소 등이 그 무기다. 시간이 지나면 쓰지 못하는 기업들의 ‘세액공제권’을 거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다. 대기업 특혜라는 틀에 얽매여 낭비할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