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의 전쟁을 경고한 가운데 미국과 영국 정상이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미사일 사용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지만 별다른 진전 없이 마무리됐다. 이에 따라 이제 전 세계의 관심은 유엔 총회로 쏠려 있다. 미국 등 서방국들이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미사일을 허용할 경우 우크라이나 전쟁은 발발 2년 7개 만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미사일 종류 등 허용 범위에 따라 러시아의 대응 수위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13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미국 백악관에서 만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논의한 뒤 "생산적인 회담을 가졌다"고 밝혔다고 BBC 방송 등이 보도했다. 스타머 총리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에 대한 결정을 묻는 언론의 질문엔 "특정 단계나 전술보다는 전략에 초점을 맞췄다"며 즉답을 피했다.
백악관 역시 두 정상이 "이란과 북한이 러시아에 살상 무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고 전했고,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회담 전 브리핑에서 "그 부분에 대한 정책은 변화가 없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이번 논의에 앞서 미국과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사용 제한을 해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이에 푸틴 대통령은 "이 같은 움직임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나토의 직접 참여를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앞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미사일을 제공했다. 다만, 확전 등 사태 악화를 우려해 자국 방어 목적 외 용도로의 사용은 제한해왔다. 각국은 오는 24일 유엔 총회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미사일 사용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이 발표될 전망이다.
◇우크라가 장거리 미사일 원하는 이유는=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2년 넘는 기간동안 거의 매일 같이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향해 포격과 폭격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공격이 시작된 기지를 직접 타격할 수 없어 방어 능력이 저해되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해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서방국들에 "장거리 미사일 사용 제한 해제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사용을 승인해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장거리 미사일 사용 제한으로 러시아의 공격에 대한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를 대신해 우크라이나는 자체 장거리 드론을 활용해 수백㎞ 거리의 러시아 본토를 공격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드론이 러시아의 레이더망에 탐지돼 요격되면서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전세를 뒤바꿀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사용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다.
젤렌스크 대통령은 이날 회담에 앞서 "러시아가 밤새 우크라이나 전역에 70대 이상의 이란제 드론을 발사했으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방공망과 장거리 공격력이 필요하다"며 장거리 미사일 사용을 허용해줄 것을 촉구했다.
우크라이나는 장거리 미사일을 활용해 자국 영토를 공격하는 러시아 공군 기지와 폭격기 편대는 물론 러시아 탄약고, 병력 집중지역, 지휘통제센터를 파괴하길 원하고 있다. 앞서 우크라이나는 스톰 섀도(Storm Shadow)를 사용해 크림반도 내 러시아 해군시설과 방공시설을 타격한 경험을 갖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 사령관인 로만 코스텐코 국방위원회 의장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스톰 섀도는 속도적인 측면에서 우크라이나에 매우 유용하다"며 "러시아군 헬리콥터나 항공기가 이륙할 때 빠르게 공격할 수 있는 훌륭한 방어 무기"라고 평가했다.
◇러시아 경고에도…서방국들, 결국 우크라에 허용?=현재 우크라이나가 보유 중인 장거리 미사일은 미국 지대지 미사일 에이태큼스(ATACMS)와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 개발한 공대지 미사일 스톰 섀도(프랑스명 스칼프-EG) 등이 있다. 스톰 섀도는 최대 사거리가 250㎞로 지난해 영국과 프랑스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무기다. 스톰 섀도는 주로 벙커와 탄약고를 목표로 항공기에서 발사돼 100㎞를 6분 만에 도달할 수 있다. 다만, 아직 영국과 프랑스는 스톰 섀도를 우크라이나 국경 내의 목표물만 발사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고 있다.
일각에선 유엔 총회에서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미사일 사용이 일부 해제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최근 이란이 러시아에 200기 이상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파타흐-360(Fath-360)’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방국들의 우크라이나 장거리 미사일 사용 제한 해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 진전시켰다. 이를 근거로 장거리 미사일 사용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은 최근 우크라이나의 전술 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에 대응해 러시아 역시 폭격기, 미사일 및 군 기반시설을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더 멀리 이동 배치한 상태다. 미국 싱크탱크인 전쟁연구소(ISW)는 스톰 섀도의 사거리 내에 약 200개의 러시아 기지가 식별되고 있으며, 미국이 러시아에 에이크탬스 미사일 사용을 승인할 경우 추가 기지가 사정거리 내에 들어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 전략컨설팅회사 시빌린의 저스틴 크럼프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내부에서, 특히 활공 폭탄 공격에 사용되는 비행장을 목표로 하기 위해 (스톰 섀도 사용에 대한)로비를 벌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장거리 미사일 허용, 전세 변화 불러올까=그러나 장거리 미사일 사용에도 전세를 바꾸기에는 열세라는 분석도 있다. 영국 국방안보 싱크탱크인 루시의 매튜 세빌은 "장거리 미사일 제한 해제가 우크라이나에 두 가지 이점을 제공할 것"며 "러시아는 방공망을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드론이 방공망을 더 쉽게 통과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장거리 미사일이 전세를 역전시킬 가능성은 없다는 게 군사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장거리 미사일 수가 많지 않고, 우크라이나 지원에 가장 적극적인 영국도 제공할 수 있는 보유 미사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 스톰 섀도의 경우 대당 가격이 100만 달러(약 13억 3200만 원)에 달하는 점도 경제난에 빠진 영국 입장에선 부담이다.
군사 분석가 마이클 코프먼은 FT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장거리 미사일 사정거리 밖으로 군사시설을 이동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장거리 미사일 사용 허가에 대한 결정이 너무 광범위하게 논의됐고, 너무 오래 걸리면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고 지적했다.
◇중대 변수될 독일 '타우러스(Taurus)'=미국이 장거리 미사일 사용을 허용하더라도 러시아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에이태큼스를 제외한 스톰 섀도 등 다른 국가들의 무기 사용만 허용할 가능성도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지난 20일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 대통령이 스톰 섀도 사용을 승인할 경우 미국이 제공한 미사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그렇더라도 앞서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한 공대지 미사일 타우러스 제공에 대한 입장이 바뀔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예정인 타우러스는 사정거리가 스톰 섀도의 두 배에 달하는 500㎞에 달한다. 독일은 타우러스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 데다, 스톰 섀도 등 다른 미사일에 비해 공격력도 더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로선 타우러스의 사용 여부도 유엔 총회를 통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