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다수가 소득 보장보다는 재정 안정에 무게를 둔 국민연금 개혁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후에 얼마를 받느냐도 중요하지만 연기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해 2030의 불안감을 덜고 기금 고갈 시 미래 세대에게 과도한 보험료(35% 안팎) 부담을 지우는 상황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은퇴를 앞둔 50대는 보장 강화를 원해 가입 기간 확대 같은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18일 서울경제신문이 이달 6일부터 13일까지 전국의 20~50대 성인 남녀 5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부의 연금 개혁안에 대한 심층 인터뷰에 따르면 50대를 제외한 모든 연령층에서 연금제도의 지속성 확보가 중요하다는 답변이 소득대체율(평균 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 제고를 앞섰다. 전체 응답자의 60.8%(31명)가 재정 안정을 꼽았다. 앞서 정부는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지금의 42%(2028년 40% 예정)로 유지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공기업에 다니는 최유승(43) 씨는 “기금 규모가 줄어드는 것은 인구가 감소하기 때문”이라며 “국민연금 위기는 굉장한 사회 위기로 재정 안정이 우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약 회사 직원인 박지예(27) 씨는 “우리 세대가 보험료만 내다가 끝나지 않게 기금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조선영(42) 씨 역시 “소득대체율을 무리하게 올리거나 유지하면 미래 세대의 부담이 지나치게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연금 수령 시기가 임박한 50대의 생각은 다소 달랐다. 자영업자인 이 모(58) 씨는 “소득대체율은 국민을 상대로 한 약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강구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인터뷰 결과에 대해 “젊은 세대들은 앞으로 보험료를 낼 기간이 많아 나중에 연금을 받을 수 있느냐가 걱정일 것”이라며 “50대 이상의 경우 이미 노후 계획을 시작했을 테고 앞으로 보험료를 낼 날은 짧기 때문에 반응이 다르지 않았겠느냐”고 평가했다.
본지 심층 인터뷰는 국민연금의 바람직한 개혁 방안을 찾기 위해 시행된 것으로 20대 13명과 30대 12명, 40대 14명, 50대 12명 세대별 의견을 최대한 담았다. 직업도 취업준비생과 대학생(20대), 대기업 종사자, 중소기업 노동자, 자영업자, 공기업 근로자 등을 모두 포함했다. 단순 설문보다는 국민들의 생각을 자세히 들을 수 있게 심층 인터뷰라는 형식을 택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현재 9%인 보험료율을 13%로 인상하는 정부 개혁안에 관해서는 대체로 “수용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감당 가능한 보험료율 상한선으로는 15%를 가장 많이 꼽았다. 하지만 김 모(29·스타트업) 씨는 “4%포인트 높이는 것은 실제로 보험료로 내는 돈이 지금보다 44% 오른다는 말”이라며 보험료 인상이 부담된다고 토로했다. 중소기업에 재직 중인 김경은(49) 씨도 “연금이 고갈되면 안 되겠지만 지금도 월세에 공과금을 내면 형편이 빠듯하다”고 말했다.
세대 간 인상 속도를 다르게 적용하는 데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정부는 20대의 경우 매년 0.25%포인트씩 16년간, 50대는 매년 1%포인트씩 4년간 총 4%포인트의 보험료 인상을 계획하고 있다. 젊을수록 인상 속도가 느리고 50대는 가장 빠르다. 취업준비생 김창영(24) 씨는 “정부가 청년 세대의 보험료 납부 기간 등을 고려해 세심한 정책을 내놓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중간에 낀 40대 조선영(42·금융사) 씨는 “연령대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있겠지만 현실적인 타협안”이라고 답했다.
반면 부담이 급격히 증가하는 50대의 생각은 이번에도 온도 차이가 있었다. 김 모(51·중소기업) 씨는 “국민연금이 어렵다는 건 알겠지만 50대가 무슨 죄가 있느냐”며 “돈을 그저 더 내라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나이가 아닌 경제력에 따라 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 모(54·유통업) 씨는 “사회보험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지불하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비판했다. 양보미(33·금융업) 씨도 “세대보다는 소득별로 보험료를 차등하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차등 인상의 실제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이 모(47·공기업) 씨는 “인상 효과를 높이려면 모든 세대에 동일한 요율을 적용해야 한다”며 “연금 진입 세대에 따라 속도에 차등을 두면 보험료율 인상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모(25·대학생) 씨는 “인상 속도에 차이가 있다지만 결국은 4%포인트 올리는 건 같은 것 아니냐”고 밝혔다.
정부가 새로 도입하기로 한 자동조정장치에 대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면 도입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자동조정장치는 가입자 수와 기대수명에 따라 연금 수급액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제도다.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박효정(27) 씨는 “연금은 지속 가능성이 중요하다”며 “자동조정장치도 지속 가능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김선진(25·잡지사 에디터) 씨는 “일본과 독일·스웨덴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대다수가 연금제도에 자동조정장치를 운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기금 고갈에 대한 우려가 큰 우리나라도 도입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김현동(25·경제단체) 씨도 “재정 안전성을 담보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이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이 모(58·자영업자) 씨는 “버스요금을 조정할 때도 많은 의견을 수렴한 뒤 결정한다”며 “국민 대다수의 삶이 걸려 있는 연금 수령액을 삭감하는 문제를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지연(51·인테리어업) 씨도 “결국 정부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기초연금과 퇴직연금을 강화해 노후 소득 보장 기능을 확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심 모(31·중소기업) 씨는 “퇴직연금은 지금도 별로 활성화가 잘 안 돼 있는데 전 사업장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재정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기초연금도 40만 원으로 일괄적으로 올릴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 위주로 선별적으로 적용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의 연금 개혁안이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공무원연금·군인연금 등 특수직역 연금에 대한 개혁도 속도를 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모(53·골프업계) 씨는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는 공무원연금에 대한 개혁도 강하게 이뤄졌으면 한다”고 했다.
한편 정부의 연금 개혁안대로 세대별 차등 보험료 인상이 이뤄질 경우 5년 뒤 20대와 40대 직장인의 월 보험료 증가 폭이 최대 2.7배까지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료 인상 속도뿐만 아니라 산정 기준이 되는 월 소득이 세대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개인의 소득과 여건에 따른 보험료 인상 폭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어 국민들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본지가 추산한 결과 보건복지부의 계획대로 연금 개혁이 진행될 경우 중견기업에 재직 중인 만 26세 A 씨의 월 보험료 자기 부담액은 올해 16만 6050원에서 내년 17만 4076원으로 8026원 상승한다. 부담액은 2029년 20만 8795원을 거쳐 10년 뒤인 2034년에는 25만 8640원까지 증가한다. 정부안에 따라 20대의 경우 매년 보험료가 0.25%포인트씩 오르고 임금은 물가 상승률 수준에 맞춰 매년 2% 정도씩 인상된다고 가정한 결과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만 45세 B 씨의 월 보험료 부담은 올해 27만 7065원에서 내년 29만 8307원으로 2만 1242원 뛴다. B 씨의 임금이 A 씨의 1.7배인 데다 40대는 보험료가 20대보다 0.25%포인트 더 오른 결과다. 5년 뒤 B 씨의 보험료는 39만 875원으로 올해보다 11만 3810원 늘어난다. 같은 기간 A 씨의 상승 폭(4만 2745원)에 비해 2.66배 높은 수치다. 10년 뒤 B 씨의 월 보험료는 48만 7848원까지 불어난다.
자영업자의 부담액은 이보다 더 크다. 고용주가 국민연금 보험료의 50%를 부담하는 임금근로자와 달리 자영업자는 보험료 전액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A 씨가 자영업자라면 올해 내고 있는 보험료는 월 33만 2100원이며 5년 뒤에는 41만 7591원의 보험료를 내야 한다. 10년 뒤 부담해야 하는 월 보험료는 51만 7280원에 달한다.
나이와 여건에 따라 보험료 인상 폭이 천차만별인 만큼 정부가 보다 상세하게 제도를 소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출생 연도에 따라 한 살 차이로 보험료 인상 폭이 달라지는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50대의 경우 매년 보험료가 1%포인트씩 오르면 고용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다”며 “자영업자의 부담을 완화할 대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