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外奎章閣)은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에 설치한 규장각의 분관이다. 정조는 외규장각 설치 이후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이라 하고, 봉안품의 성격을 구분해 내규장각과 외규장각에 나눠 보관했다.
외규장각의 중요성은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하도록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정리한 기록물을 보관한 곳이란 점이다. 외규장각에는 △왕실 물품 △어제(御製:왕이 지은 글)·어필(御筆:왕의 친필) △기타 족자류 △의궤(儀軌) △의궤 외 서적 등 총 5166점이 봉안돼 있었다.
특히 외규장각에 봉안된 의궤의 경우 임금이 보는, 이른바 어람용(御覽用) 의궤로 신하들이 보는 분산용과 같은 다른 의궤에 비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이처럼 중요한 기록물을 보관하는 외규장각을 강화 행궁에 설치한 이유는 한양에서 가까우면서도 국내의 변란과 외적의 침입이 발생했을 때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강화 행궁이 그만큼 안전지대라는 인식 탓에 주요 기록물을 보관한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때부터 서양 전함이 한반도 연안에 자주 출몰하면서 안전지대로 여긴 강화도는 서양 열강의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강화에 침략해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의궤 300여 책을 포함한 도서 360여 책을 약탈했다. 프랑스에 반출된 대부분의 의궤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었다.
1975년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외규장각 의궤의 소재와 목록이 국내에 알려지게 된다. 이후 1991년부터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요청해 2010년 G20정상회의에서 양국의 대통령이 만나 외규장각 도서를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고 5년마다 임대를 갱신하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2011년 병인양요가 발발한 지 145년 만에 마침내 297책의 의궤가 우리나라로 귀환한다. 현재 외규장각 건물은 2003년 강화군이 복원했다. 내부에 외규장각의 설치 과정과 의궤의 반환 과정 등의 내용을 다룬 전시실이 조성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