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공지능(AI) 생태계의 정점에 있는 미국 엔비디아는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국내 영상 AI 스타트업인 트웰브랩스에 100억 원 이상을 쏟아부었다. 엔비디아의 기업형벤처캐피털(CVC)인 엔벤처스(NVentures)가 한국 스타트업에 투자한 첫 사례였다. 인텔 산하 인텔캐피털도 트웹브랩스 투자에 참여했다. 미국 빅테크가 CVC를 앞세워 혁신적인 기술을 보유한 국내 벤처기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국내 CVC의 한 고위 관계자는 “엔비디아·구글·인텔이 딥테크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면서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장기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CVC를 통한 지분 투자가 필수적인데 국내에서는 출자 관련 규제가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26일 벤처 투자 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CVC 규제 완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창업 초기 단계에서 매출을 내기 어려운 딥테크 분야 스타트업이 CVC의 투자를 받으며 해외 진출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국내 로봇 스타트업 창업자는 “일반 벤처캐피털(VC)보다는 CVC 투자를 더욱 선호하는 편”이라며 “대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안정적으로 제품 수주를 받을 수 있고 해외 동반 진출도 노려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재무적 투자 위주의 일반 VC와 달리 전략적 협력 관계 구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CVC 생태계는 해외 주요국과 비교하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많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CVC가 지난해 집행한 벤처 투자액(일반 지주회사 CVC 제외)은 총 1조 9000억 원으로 전체의 19%를 차지했다. CVC 업체 수는 총 98곳으로 전체의 27%를 차지했다. 반면 미국과 일본에서는 CVC 비중이 절반에 육박한다. 벤처 투자 규모 기준 미국은 49.5%, 일본은 45.0%가 CVC로부터 나온다. 또한 일본의 CVC 수는 700곳을 넘어섰다.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전 세계 상위 10곳(투자 건수 기준)의 CVC 중 일본 기업이 5곳에 달했다.
규제 완화를 통해 선진국형 CVC 생태계가 조성되면 스타트업 인수합병(M&A)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 실제로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CVC로부터 투자 유치 경험이 있는 국내 스타트업의 M&A는 169건(65.8%)으로 CVC 투자가 없는 스타트업의 88건(34.2%)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았다. 업계에서는 기업공개(IPO) 방식으로는 엑시트에 8년 이상의 기간이 걸리는 만큼 M&A 활성화를 위한 CVC 지원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벤처캐피탈협회 등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스타트업 회수 중 M&A가 차지한 비율이 미국은 94.6%에 달했지만 한국은 58.1%에 그쳤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우리나라 M&A 시장 규모는 모험자본 투자 대비 매우 협소한 수준으로 향후 M&A 시장이 수배 이상의 규모로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 모험자본 회수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정책금융 의존도가 높은 국내 모험자본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타트업의 스케일업을 촉진하는 CVC의 전략적·후기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국내 벤처 투자 업계는 최근 단행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빅컷(0.50%포인트 금리 인하)과 함께 정책 시너지가 극대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내년 모태펀드 출자 예산도 올해보다 460억 원 늘어난 5000억 원으로 편성됐다. 유정희 벤처기업협회 혁신정책본부장은 “올 상반기 국내 벤처 투자 시장이 다소 살아났지만 이는 워낙 좋지 않았던 지난해의 기저 효과에 따른 부분이 크다”며 “한국은행이 글로벌 기조에 따라 금리를 내리고 시중 유동성이 늘어나면 당연히 국내 벤처 시장 역시 회복세를 이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더불어민주당이 재벌 특혜라는 이유로 정부가 CVC 규제 완화 방안을 담아 추진할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반대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동안 야당은 대기업이 외부 자금을 과도하게 끌어오면 금융사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지난해 정부안을 반영해 윤창현 전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결국에는 폐기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