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통화 당국의 ‘빅컷(0.5%포인트 금리 인하)’에 이어 이달 한국도 금리 인하가 확실시되지만 상장사 실적은 악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달 전보다 영업이익이 하향 조정된 곳이 10개사 중 4개사에 해당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최근 중국의 경기부양책에 따른 투자자 쏠림, 미 대선과 중동 정세 등 불안 요소, 정책 변화가 실물 경기에 반영되기까지 걸리는 시간 등을 두루 감안하면 우리 증시가 당분간 박스권 내에서 횡보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실적주 중심으로 투자 대상을 압축해야 그나마 낭패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일 금융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064850)에 따르면 지난달 24일 기준 증권사 3곳 이상 실적 전망치를 제시한 상장사 261개 기업 가운데 108곳(41.37%)의 4분기 영업이익이 1개월 전 대비 하향 조정됐다. 매출 추정치를 내린 곳은 122곳으로 전체의 46.74%에 달했다. 구체적으로 코스피 상장사 196개 기업 가운데 82곳(41.8%), 코스닥 65개사 중 26곳(40%)의 영업이익 추정치가 떨어졌다.
반면 상향 조정된 기업은 코스피 65개, 코스닥 20개에 불과했다.
특히 코스피 시총의 24%를 차지하는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의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하향 조정됐다. 삼성전자는 기존 14조 7926억 원에서 13조 1009억 원, SK하이닉스는 8조 5546억 원에서 8조 1941억 원으로 각각 줄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인 블랙웰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AI)를 활용한 비즈니스 모델이 뚜렷이 부각되지 않으면서 빅테크의 투자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는 데다 레거시 D램 가격이 재고 증가로 하락세인 점이 불안을 가중시키는 양상이다. 개별 기업으로 보면 삼성전자의 경우 엔비디아 대상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이 늦어지는 점이, SK하이닉스는 최근 양산을 시작한 HBM3E 12단 제품의 원가가 이전 제품 대비 높은 점이 실적에 반영되고 있다. 백길현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단기적으로 레거시 메모리 가격 상승 모멘텀이 둔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시장 진입이 일부 이뤄져 가격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증권사들은 현대차(005380)의 4분기 영업이익 추정치도 기존보다 0.9% 내린 3조 8402억 원으로 조정했다. 이로써 시장에서는 코스피 상위 5개 종목 가운데 3곳의 영업이익이 기존 전망치를 하회할 것으로 내다봤다.
기업 경영에 유리한 금리 인하 사이클이 시작됐음에도 4분기 실적 전망이 암울한 이유는 아직 고금리 정책 기조의 영향이 계속되고 있는 탓이다. 게다가 경기 둔화에 대한 우려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황승택 하나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미국 금리를 인하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기 침체 속도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연착륙이든 경착륙이든 결국 경기 둔화가 시작됐다는 측면에서 기업 실적이 공격적으로 늘어나기는 어렵다”고 짚었다. 강현기 DB투자증권 파트장은 “일반적으로 미국 금리 정책 변화가 경기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보통 1년 5개월에서 1년 6개월 정도 걸린다”며 “지금은 오히려 고금리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여기에 원·달러 환율이 내려가면서 그간 강달러로 효과를 본 수출 가격 경쟁력이 약화된 점도 일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강 파트장은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수출에 있어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는데 최근 달러가 약세를 보이며 수출 기업에 다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며 “추후 경기가 부진하고 위기로 인식이 되면 안전자산인 달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져 강달러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전반적으로 환율이 상승하면 수출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개별 기업 실적이 반등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적 부진에 국내 증시는 당분간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경기 부양책으로 현지 증시가 급등해 외국인 등 투자자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리는 점도 부담이다. 황 센터장은 “주가에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실적이 부진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차에 중국이 대체 투자처로 부각되고 있다”며 “실적주 중심, 경기 방어적 투자 대응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