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두 개의 ‘두 국가론’이 등장하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나는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23년 12월에 선보인 두 국가론이다. 김정은은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가 됐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우리 공화국의 력사에서 ‘통일’ ‘화해’, 그리고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올 9월에 내놓은 두 국가론이다. 임 전 실장은 “통일을 버리고 평화를 선택하자”며 북한의 두 국가론과는 다소 결이 다른 두 국가론을 제시했다.
김정은의 두 국가론은 ‘적대적 두 국가론’이다. 남한과 북한이 “전쟁 중에 있는 (적대적)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했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을 반영해 통일이나 민족 같은 개념에 구애받지 말고 완전히 딴살림을 차리자는 얘기다. 김정은의 발언 어디에서도 통일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내려놓으면 남북 관계가 평화로워질 것이라는 논리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여차하면 “무력으로 한국을 통일해서 ‘영토 완정’을 실현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통일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영토 완정을 실현해야 만 북한판(版) 한반도 평화를 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의 발로(發露)다.
임 전 실장의 두 국가론은 이와 달리 ‘평화적 두 국가론’이다. 통일을 추구하지 말고 평화적인 남한과 북한, 두 국가의 관계를 구축하자는 주장이다. 한국의 통일 정책이 북한 정권에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통일을 포기하면 평화로운 남북 관계가 형성될 것이라는 논리다. 과연 한국의 통일 정책이 평화롭지 못한 남북 관계의 원인일까.
사회과학에는 ‘반사실적(counterfactual) 추론’이라는 방법론이 있다. 반사실적 추리는 어떤 인과적 상황을 “만약 A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B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방식으로 추론한다. 만약 한국이 통일 정책을 일찌감치 포기했다면 남과 북은 평화로운 두 국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지금이라도 통일과 민족을 포기한다면 남북 평화가 찾아올까.
사실 이 질문에는 ‘반사실적 추론’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지 않다는 ‘실증적(empirical)’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 정부가 실질적으로 통일은 미뤄놓고 ‘평화 공존’을 우선 추진했을 때도 남북 관계는 결코 평화롭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통일은 훗날의 일이라며 평화의 제스처를 북에 보냈을 때 김정은 일가는 욕설과 협박, 그리고 핵미사일 도발로 되돌려줬다. 한국의 통일 정책이 남북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는 실증적 증거는 차고 넘친다.
남과 북은 같은 말과 풍습, 그리고 같은 역사를 공유한 같은 민족이다. 남과 북은 분단 이전 1300년 이상 통일된 단일 민족국가로 한반도를 영위해왔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 부정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과 북한 모두 민족과 통일을 부정해도, 더 잘살고 더 자유롭고 더 강한 한국으로 통합되려는 구심력은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북한에는 더 부강하고 자유로운 한국, 그 존재 자체가 실존적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남과 북이 민족과 통일을 인위적으로 국가 정책에서 제거하더라도 남과 북의 평화 공존이 어려운 이유다. 북한 정권에는 결국 한국이 사라지거나 적어도 많이 ‘망가져야’ 실존적 위협이 줄어드는 것이다. 남북 갈등의 원인은 한국의 통일 정책이 아니라 북한 3대 세습 정권의 모순과 실패에서 찾아야 한다.
임 전 실장은 “남북 간 적대와 불신은 민족과 통일로부터 비롯됐다”고 진단하고 있는데 정확한 ‘진단’이 아니다. 따라서 민족과 통일을 지워내 남북 평화를 확보하자는 ‘처방’ 역시 잘못된 처방이다. 차라리 ‘영토 완정’으로 평화를 구현하겠다는 김정은의 주장이 더 현실적으로 들린다. 한반도의 통일 환경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과 통일은 누가 인위적으로 지워내고 그럴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지워낸다고 평화가 오는 것은 더욱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