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맞습니다! 제가 살인을 했습니다!”
마치 가스라이팅을 당한 피해자처럼, 트랍스는 자신의 ‘유죄’를 외친다. 그는 약 1시간 20분 동안 ‘나는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나는 상식적으로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180도 태세를 전환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시극단의 하반기 세 번째 작품 연극 ‘트랩’의 한 장면이다. 은퇴한 법조인들이 펼치는 모의 법정 게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연극은 스위스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단편소설 ‘사고(Die Panne)를 원작으로 한 블랙 코미디다.
주인공 트랍스는 출장길에 우연히 들른 시골의 한 집에서 퇴직 판사인 집주인과 친구들의 재판 놀이에 참여하며 사건에 휘말린다. 집주인은 과거 검사였던 친구 초른, 변호사였던 쿰머, 사형집행관이었던 필렛을 초대해 트랍스에게 모의 법정 놀이를 제안한다. 당연히 피고는 트랍스다. 재미로 참여한 재판에서 트랍스는 그만 자신의 감추고 싶은 비밀을 하나씩 털어놓게 된다. 퇴직한 법조인들의 심문은 사실 별 게 없다. 그저 ‘당신은 살인을 한 적이 있느냐’고 반복해서 물어보며 피고의 화를 돋우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트랍스는 말려든다.
트랍스를 연기하는 배우 김명기는 탁월한 표정연기로 퇴직 법조인들의 유도 심문으로 변화하는 심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만만해 보이던 얼굴은 점차 진지해지고 가끔 사색이 되기도 한다. 분명 무죄라고 외치던 입은 어느새 유죄를 주장하고 있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에는 광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연기뿐 아니라 독특한 무대 기획도 눈여겨볼 만하다. 무대는 다이닝룸처럼 꾸며져 있다. 집주인과 친구들은 고급 와인을 마시며 점차 술에 취하면서 트랍스를 심문한다. 여기에 가사도우미 시모네의 피아노 연주까지 더해지면서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하지만 관객석은 법정의 배심원석처럼 구성돼 무대와 달리 엄숙하다. 이같은 무대 연출은 심문이 지속될수록 관객들의 긴장감을 높이고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극중 트랍스는 이 어처구니 없는 심문에서 자신의 죄 아닌 죄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 죄를 빌미로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한다. 이번 작품은 ‘육쌍둥이’ ‘슈미’ 등을 연출하고 ‘새들의 무덤’으로 제45회 서울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하수민이 연출을 맡았다. 작가는 이 장난스러운 모의 법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하수민은 프레스콜에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과 양심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연극에서도 장르적인 쾌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했다”며 “양심을 생각하지 않는 사회를 사는 게 가치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공연은 10월 2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