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해외 시장조사 기관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비롯해 국내에서도 한국 반도체 산업이 불안하다는 지적이 쏟아지면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을까. 그것은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여러 가지 환경이 한꺼번에 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세계 최대의 반도체 수요 시장이지만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했던 중국 시장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중국의 반도체 제조업은 중국 정부가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후 막대한 투자를 했음에도 첨단 제조 장비 도입이 어려워 기술 발달이 부진한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자체 개발한 기술로 생산한 메모리반도체가 중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한국 기업에도 중국이 가장 큰 시장이기 때문에 매출 감소에 대한 염려는 당연하다.
다음으로 반도체 시장에서의 경쟁이 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가 경제안보의 핵심으로 부상하자 주요 선진국들은 반도체 산업 정책을 재정비하고 있다. 기존의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불안감에 지금까지는 해외 생산에 의존한 반도체를 자국 내에서 직접 생산하겠다는 것이 주요 정책 방향이다. 이에 세계 곳곳에 새로운 반도체 공장이 건설되고 있으며 공장이 완성된 후에는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하나는 인공지능(AI)으로 인해 반도체 산업 구조가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AI 기술이 빠르게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반도체 성능이 그만큼 빠르게 개선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반도체 산업의 구조도 함께 변화하고 있다. 기존의 AI 기술 개발에는 중앙처리장치(CPU)가 주로 이용됐으나 최근 그래픽처리장치(GPU)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세계 최고 매출 기업의 순위가 바뀌었다. 또 지금까지 시스템반도체는 소비자 맞춤형 생산 방식이, 메모리반도체는 공급자 위주의 생산 방식이 일반적이었으나 AI 시스템에 사용되는 메모리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는 소비자 맞춤형 생산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메모리반도체는 종합반도체기업(IDM)이 직접 모든 공정을 관리하고 생산하기 때문에 반도체 위탁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파운드리 기업과의 협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HBM을 생산하기 위해 메모리반도체 기업과 파운드리 기업이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기술 협력을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주변 환경이 함께 크게 변화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이 위기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모두 한국 반도체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 시장을 면밀하게 분석하면 중국 제품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는 제품군은 한국산 제품과의 경쟁이 처음부터 거의 없었던 영역이다. 또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반도체 제조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가 국내에 조성되고 있다. 게다가 AI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반도체 분야는 한국 기업의 점유율이 90% 이상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당장 무너질 만큼의 위기를 맞은 것은 아니다. 다만 절대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므로 장기적인 전략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추진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