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미국인들이 소련으로 이민을 가려고 합니다.”
대공황이 휩쓴 1920년대 미국의 백악관. 루즈벨트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억만장자 워벅스 씨와 다른 정치인들에게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내놓으라고 재촉한다. 정치인들은 “미국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때 빨간머리 여자 아이 애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른들 틈을 비집고 나오며 말한다. “왜 희망이 없어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잖아요.”
이달 초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애니’의 한 장면이다. 빨간머리의 어린이 배우 곽경은 눈웃음을 치며 딱딱한 표정의 어른들에게 “내일은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요. 견뎌요(뮤지컬 ‘애니’ 넘버 ‘투모로우' 가사)”라고 말한다.
뮤지컬 ‘애니’는 1924년 해롤드 그레이의 만화 ‘작은 고아소녀 애니’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다. 1977년 브로드웨이 초연 후 세계 32개국에서 무대에 오른 스테디셀러다. 국내에서는 2019년 공연된 후 5년 만에 다시 개막했다.
애니는 ‘5세 이상 관람가’다. 하지만 어린이만을 위한 뮤지컬은 아니다. 고아원에서 탈출한 여자아이 애니가 우연히 억만장자 워벅스 씨를 만나 절망에 빠진 미국의 어른들에게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는 휴먼 드라마다. 오히려 어른을 위한 뮤지컬이라고 하는 쪽이 더 어울린다. 그래서일까. 관객석에서는 자녀의 손을 잡고 공연장을 찾았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훔치는 어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온라인 관람평에는 어른 관객들의 ‘연차 관람(한 작품을 여러 번 보는 것)’ 후기도 이어진다.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이는 단연 어린이 배우들이다. 고아원 어린이들은 마치 한 목소리인것처럼 노래하고, 성인 뮤지컬 배우처럼 능숙하게 연기한다. ‘컨디션 난조가 무엇이냐'고 묻는 듯한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작품을 이끌어 간다.
도입부에서 어린이들이 함께 부르는 ‘하드 녹 라이프(Hard knock life)’는 어른들 사이에서 ‘출근길 명곡’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해진 넘버다. 어린이 배우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매일 하기 어려워 보이는 고난도의 아크로바틱도 척척 해내며 이 어려운 감정을 소화한다. 27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애니역을 맡은 곽보경, 최은영의 어른 뺨 치는 연기와 분량에 상관 없이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어린이들의 탁월한 성실함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감동을 극대화한다.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애니의 꿈은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다. 애니는 과연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공연을 보기 전 가장 유명한 두 곡 ‘투모로우(tomorrow)’와 ‘하드 녹 라이프(hard knock life)’는 미리 예습이 필요하다. 그래야 ‘다 함께’ 부르는 시간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다. 공연은 10월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