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반도체 관세 인상을 언급하자 국내 산업계는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트럼프는 지난해부터 반도체지원법(칩스법)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으나 반도체 관세장벽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트럼프는 “대만이 미국 반도체 산업을 훔쳤다”고 주장했고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조 바이든 행정부의 주요 산업 정책에 반대 의견을 밝혀왔다. 미 대선이 초접전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반도체법에 기대 거액을 투자해온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물론 자동차·2차전지 등 국내 주요 산업 전반에 ‘트럼프 리스크’가 현실화하는 분위기다.
트럼프가 당선되고 반도체 관세가 적용된다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된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 파운드리 건설 대가로 64억 달러(약 8조 7600억 원)를,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 패키징 시설을 위해 4억 5000만 달러(약 6200억 원)를 지원받기로 돼 있다. 하지만 반도체법 지원금은 아직까지 지급되지 않은 상태로 약속했던 ‘당근’은 사라지고 ‘채찍’만 남게 되는 셈이다. 특히 최근 실적 악화와 수주 부진으로 테일러 팹 완공 시점을 연기한 삼성전자로서는 글로벌 반도체 대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현재 3나노 이하 초미세공정 외부 수주가 부진한 상황에서 기약 없이 공장을 짓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배터리 등 국내 주요 산업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현대차·기아가 미국 앨라배마와 조지아 공장에서 현지 수요를 채우고 있지만 미국 시장에 판매되는 차량 상당수는 국내 생산에 의존하고 있다. 고율의 관세를 부과받으면 이익이 줄어들거나 차량 가격을 높일 수밖에 없다. 배터리 업계도 ‘트럼프 리스크’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미국 고객사와 현지 생산 체제를 구축해 IRA에 따른 인센티브를 제공받고 있다.
관세장벽을 세운다는 정책이 외려 미국 기업들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도체법에 기대 미국에만 1000억 달러(약 138조 원) 규모를 투자한 인텔이 문제다. 실리콘밸리 테크계와 워싱턴 정가에서는 반도체법이 인텔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공공연하다. 실제 인텔은 직접 보조금만 85억 달러(약 11조 8000억 원)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경영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은 인텔이 보조금을 제때 지급받지 못한다면 파산을 걱정해야 할 처지로 내몰릴 수 있다. 61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보조금을 받기로 한 마이크론을 비롯해 정책 자금·발주 없이는 생존이 힘든 방위산업용 반도체 설계·제조사들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반도체 장비·소재 생태계 전반이 아시아·유럽에 흩어져 있다는 점도 미국 산업계에는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 ASML·도쿄일렉트론 등 외국 장비·소재에 높은 관세를 물린다면 투자비가 폭증할 수밖에 없어서다. 이는 반도체 공급 부족과 가격 인상을 부른다. 막대한 인공지능(AI) 관련 투자를 집행 중인 미국 테크기업들의 부담도 가중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생성형 AI 학습·연산을 위해 필수적인 클라우드 시장 70% 이상을 점유 중이고 클라우드 업체는 AI 칩셋 등 고급 반도체의 최대 수요처다.
외신들도 트럼프식 관세가 미국 산업 전반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의 주장은 미국이 글로벌 반도체 10%만을 생산하고 있고 대만 등 외국 반도체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며 “반도체는 자동차부터 무기,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사용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