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후 1시 서울 서대문구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열린 대한외과학회 제76차 추계학술대회에는 전 세계 33개국 외과의사 2400여 명이 참석했다. 낸시 간트(Nancy L. Gantt) 미국외과학회(ACS) 회장, 아키노부 타케토미(Akinobu Taketomi) 일본외과학회(JSS) 회장 등 초청연사와 해외 참석자를 제외한 국내 등록인원은 2300명 남짓이다. 통상적인 참석 인원보다 3분의 1가까이 줄었다.
정순섭 대한외과학회 총무이사(이대목동병원 외과 교수)는 "의정사태로 인해 예년보다 참석률이 저조한 편이다. 전문의의 경우 등록자가 1600명도 안된다"며 "전공의들이 떠난 뒤 현장에 남아 있는 의사들 중 상당수는 당직을 서느라 학술대회에 참석하질 못했다"고 말했다.
대한외과학회는 18개 분과학회와 7개 산하 연구회를 보유한 국내 외과계 대표 학술단체다. 1947년 학회의 전신인 조선외과학회가 창립한 이래 매년 춘계, 추계학술대회를 열어왔는데 지난 5월에는 그 전통을 깼다. 전공의들이 의대 증원 추진에 반발해 집단 이탈한 상황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에서다. 학회를 여는 대신 외과 등 필수의료 분야의 현안을 논의하는 토론회를 열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번 추계학술대회는 외과계 해외단체들과의 네트워크 등이 예정돼 있었던 만큼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는 것이 학회 측의 설명이다. 신응진 대한외과학회 이사장(순천향대 중앙의료원 특임원장 대장항문외과 교수)은 "춘계학술대회를 취소하고 대토론회를 열면서 사태가 하루빨리 수습되길 바랬는데 해를 넘길 것 같아 안타깝다"며 "즐길 만한 상황은 아니지 않나. 추계학술대회를 열더라도 저녁만찬 등 부대행사는 일절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이날 행사장은 평소보다 무거운 분위기가 깔렸다. 학회에 참석한 의사들은 근황을 나누며 "(의정 사태가) 언젠가는 끝나지 않겠나", "힘내시라"고 격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길만한 소식은 전공의가 200명 가까이 등록했다는 점이다. 김진 대한외과학회 학술이사(고대안암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는 "오늘 현장에 온 전공의가 110명쯤 된다. 등록자 중 과반수가 첫날 참석한 것"이라며 "부득이 병원을 떠나있음에도 외과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전공의들이 있다는 점은 희망적"이라고 했다.
외과학회에 따르면 전국 수련병원의 1~3년차를 전부 합친 전공의 정원은 150명 정도다. 외과 전문의가 되겠다고 지원한 전공의를 어림잡아 450명이라고 가정하면 절반 정도는 필수의료 분야에 종사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의 스승이자 선배인 기성의사들이 "외과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필수의료에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신 이사장은 “내년에 전공의들이 얼마나 돌아올지, 언제쯤 이 사태가 끝날지 장담할 수 없다”면서도 “외과의 명맥이 끊어져선 안된다는 신념과 함께 긴 호흡을 가지고 의료 정상화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상대가치점수 등 기형적인 제도 때문에 힘들고 위험한 수술을 하는 외과를 운영할수록 병원이 손해를 본다. 그러니 외과의사들이 보상은 커녕 기피하는 분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악조건 속에서도 매년 의대 졸업생의 약 5%는 외과를, 약 1%는 흉부외과를 지원했다"며 "사명감을 가지고 필수의료 분야에 지원하는 의사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 이사는 "분명 힘이 든 데도 지원자가 몰리는 진료과가 있지 않나.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덜 힘든 과목만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필수의료 분야의 붕괴를 막으려면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의료사고에 대해 과도하게 의사의 책임을 묻는 제도 손질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