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신상공개' 범죄자 과잉보호에 피해자 두 번 운다

[14년된 범인신상공개제도 '허점']

법원, '공개 정지' 가처분 신청 기각

공개 예정이지만 시간 끌기에 당해

범인 거부하면 신상 '즉시' 공개 불가

피의자 동의 없음 유예기간 최소 5일

가처분 신청 시 피의자만 유리해져

사체훼손 현재까지 10명 신상공개

대부분 동의 구하고 신상 즉시 공개

전문가 "여론 식기 기다리기 위한 것"

함께 근무하던 여성 군무원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강원 화천군 북한강에 유기한 현역 군 장교가 5일 오전 춘천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이 끝난 뒤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함께 근무하던 여성 군무원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강원 화천군 북한강에 유기한 현역 군 장교가 5일 오전 춘천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이 끝난 뒤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흉악범의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제도가 시행된 지 14년이 흘렀지만 피해자보다는 범죄자에 대한 과도한 보호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북한강 일대에서 사체를 훼손한 육군 장교 A 씨 역시 공개심의위원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제도 허점에 막혀 제때 신상 정보가 공개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범죄가 갈수록 흉악해지는 가운데 시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신상 정보 제도가 좀 더 피해자 중심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11일 춘천지방법원은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육군 장교 A(38) 씨가 제기한 '신상정보 공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고 밝혔다. 피의자의 신상 공개로 피의자에 대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 발생 우려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신상 공개는 즉시 이뤄지지 못한다. 현행법상 검사와 사법경찰관은 피의자에게 신상 정보 공개를 통지한 날부터 5일 이상의 유예 기간을 두고 신상 정보를 공개해야 하며 ‘즉시’ 공개는 피의자가 서면으로 이의 없음을 표시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A씨의 신상은 유예기간이 끝난 오는 13일 공개될 전망이다.

앞서 이달 7일 강원경찰청은 자신과 함께 근무하던 30대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해 유기한 A 씨에 대한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를 개최하고 정보 공개를 의결했다. 범행 수단의 잔인성, 피해의 중대성, 충분한 증거, 국민의 알 권리, 공공의 이익 등 공개 요건을 모두 충족했다고 본 것이다.



통상 신상 공개 대상 피의자의 신원이 공개 의결 직후 공개돼왔다. 그러나 A 씨는 신상 공개 결정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 범죄 혐의점이 뚜렷한 피의자가 신상 공개가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관련기사



A 씨는 더 나아가 춘천지방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A 씨는 ‘신상 정보 공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과 본안 소송인 ‘신상 정보 공개 처분 취소 청구’ 행정소송을 걸었다. A 씨 입장에서는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지면 본안 소송이 끝날 때까지 신상공개가 미뤄지는 것이고, 결국 신청이 기각됐지만 여론의 눈을 돌리기 위한 5일의 시간을 번 셈이기 때문에 이의 신청을 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실제 2020년 7월 경찰은 텔레그램 ‘n번방’을 통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구매했다는 혐의를 받는 30대 남성에 대한 신상 정보 공개를 결정했지만 피의자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여 공개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후 본안 소송에서 법원은 강원경찰청의 손을 들었지만 이미 신상 공개로 얻을 실익이 없어진 후였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신상이 공개된 ‘사체 훼손’ 관련 범죄자를 분석한 결과 현재까지 정유정·허민우·유동수·장대호·고유정·변경석·조성호·김하일·박춘풍·오원춘 등 10명의 신상이 공개됐다. 2010년 특례법 시행 이후 사체 훼손으로 신상 공개가 검토됐던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신상이 공개됐다. 사회적으로 이미 신상이 드러난 유영철과 심기섭 등 사체를 훼손한 살인범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많다.

그럼에도 A 씨가 법원에 가처분 신청과 행정소송을 제기한 이유로 전문가들은 ‘여론의 무관심’을 노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만종 호원대 법경찰학과 교수는 “당초 경찰은 검거된 지 나흘 만에 신상 정보 공개 결정을 내렸지만 피의자가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일주일이 넘도록 범인의 신상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며 “피의자가 신상 공개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인지하고도 고의로 시간을 끌어 사회적 관심이 식기를 기다리는 것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현행 신상 공개 제도가 시행된 지 15년이 다 돼가는 만큼 공개 요건 등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법 시행 초기에는 범죄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낙인 효과를 피하고자 신상 공개 범위와 절차를 신중하게 결정한 측면이 있다”며 “그러나 이번 같은 극단적 범죄가 발생할 경우 사회적 불안감을 잠재우고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범죄에 대해 일률적으로 신상 공개 요건을 적용하기보다는 즉시 공개 요건을 만드는 등 법률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경북경찰청은 이날 경북 구미시의 한 아파트 복도에서 전 여자 친구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는 미용사 B(36) 씨의 신상 공개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채민석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