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다산은 돌격대장이자 다혈질이었습니다. 수 틀리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죠.”
정민 한양대 교수의 손 끝을 통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의 젊은 시절이 되살아났다. 이달 9일 출간되는 ‘다산의 일기장’을 통해서다.
정 교수는 3일 ‘다산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간 다산을 새롭게 살펴보고 싶었다”며 “완전무결하고 위민정신의 화신이었던 다산 대신 분노할 줄 알고 옳은 것을 위해 싸우기도 했던 젊은 날의 다산이 있었기에 강진 시절의 다산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젊은 날의 다산을 입체적으로 복구하기 위해 젊은 날 다산이 썼던 일기를 바탕으로 정 교수는 떠오르는 100가지 질문에 대해 직접 답을 만들어 나갔다. '금정일록'(金井日錄), '죽란일기'(竹欄日記), '규영일기'(奎瀛日記), '함주일록'(含珠日錄) 등 그간 문집에 전하지 않았던 일기를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더했다. 1795년 7월부터 1797년 6월까지, 다산이 33∼35세였을 때의 기록이다. 정 교수는 “원래는 200~300쪽 분량의 해제를 쓸 생각이었는데 이를 완전히 바꿨다”고 설명했다.
일기에도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다산이지만 정 교수는 감춰진 '행간'에 주목한다. 서학(西學)과 관련한 처벌 논의나 상소 공방이 거셌던 당시 정국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다산이 말을 아끼거나, 그답지 않게 '자화자찬'하는 대목을 면밀히 들여다본다.
책은 1795년 초 다산이 정3품 관리로서 승승장구하던 시절 충청도 금정으로 좌천된 이유가 무엇인지, 당시 다산이 천주교도를 적극적으로 잡아들인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답한다. 또, 정조(재위 1776∼1800)와 자신을 비방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서학의 원죄' 때문에 벼슬에 나아갈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을 올린 배경과 글에 담긴 실제 의도를 설명한다.
정 교수는 “다산이 보여준 통찰과 고민 그리고 좌절과 극복의 과정을 살펴서 그 안의 내재된 의미를 우리의 가치로 바꿀 수 있을까에 집중했다”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깨달음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