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위해 ‘의회 패싱’이라는 강수를 뒀다. 이에 반발한 프랑스 의회가 정부 불신임안을 발의하면서 프랑스 정국이 예측할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프랑스 내각이 의회의 반대로 62년 만에 붕괴할 위기에 놓이면서 유럽 금융시장도 크게 요동쳤다.
미셸 바르니에 총리는 2일(현지 시간) 하원 표결 없이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해 내년도 예산안의 핵심인 사회보장 재정 법안을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법안은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가족 지원 등 각종 사회보장 시스템의 재정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예산안이다. 이날 법안 심사가 열리는 하원에 출석한 바르니에 총리는 “우리 모두는 자신의 책임을 직시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에 도달했다”며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예산안 채택 강행이 불가피했다고 강조했다.
바르니에 정부는 앞서 내년도 예산안을 제출하며 413억 유로(약 61조 원) 규모의 공공지출을 줄이고 193억 유로(약 28조 5000억 원)의 부자·기업 증세를 통해 내년도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낮추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공공지출 삭감을 위해 사회보장 재정안 채택이 필수였지만 원내 1야당인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과 단일 정당으로 최대 규모인 극우 국민연합(RN)이 사회복지 축소와 프랑스인의 구매력 감소 등을 이유로 반대해왔다.
NFP와 RN은 정부 불신임안을 즉각 발의했다. RN을 이끄는 마린 르펜 하원 원내대표는 “7년간 에마뉘엘 마크롱이 보인 무능함에 프랑스 국민이 대가를 치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발했다. 프랑스 헌법상 내각 불신임안은 하원 재적 의원의 과반수 찬성이 있으면 가결된다. 전체 577명 중 2석(공석)을 제외한 가결 정족수는 288명이다. NFP와 RN의 합계 의석수가 300석이 넘는 상황에서 가결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4일 오후 치러질 표결에서 불신임안이 통과되면 바르니에 정부는 총사퇴해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던 모든 예산안도 폐기될 수 있어 이달 31일 예산안 처리 기한을 넘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 경우 공무원 급여 지급 등이 불가능해져 공공행정이 마비되는 ‘셧다운’에 빠질 수 있다. 1958년 이후 정부 불신임안이 발의된 경우는 130건이 넘지만 실제로 내각 해산까지 이른 것은 1962년이 마지막이다. 올 9월 출범한 바르니에 내각이 실제로 해산한다면 62년 만이자 사상 최단 집권 정부로 기록되는 셈이다.
내각이 붕괴될 위험 속에서 금융시장은 크게 요동쳤다. 이날 달러 대비 유로화는 1.046달러 선까지 내려와 14개월 만에 최저 수준이 됐고 유럽 국채시장에서 위험지표로 쓰이는 10년 만기 기준 독일 국채와의 스프레드(금리 차)도 0.88%포인트까지 상승해 12년 만에 최대 폭으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