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이 탄핵 정국 장기화에 따른 ‘P(정치) 리스크’에 직격탄을 맞았다. 불확실성 극대화로 원·달러 환율이 연내 최고 1500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면서 ‘한국 금융 건전성에 경고등이 켜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금융 당국과 금융 업계는 해외 언론, 투자자들과 잇달아 간담회를 열어 “문제 없다”며 안심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시에 금융사들은 가뜩이나 순이자마진(NIM) 등 수익지표가 꺾인 상황에 정치 리스크마저 덮치면서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한 비상 대응 태세에 돌입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10일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JP모건체이스 등과 간담회를 열어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이지만 경제문제만큼은 경제부총리 등 경제팀을 중심으로 일관되고 안정적으로 관리해나가고 있다”며 “시장 안정을 위한 정부의 준비 태세는 확고히 유지되고 있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연착륙,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자본시장 선진화 등 주요 정책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융지주들도 탄핵 정국 장기화 여파로 해외 금융 당국과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국 금융사와 시장은 안정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글로벌 네트워크 총동원에 나섰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미국·영국·독일·싱가포르 등 금융 허브 국가의 당국과 현지 투자자들에 ‘(금융) 펀더멘털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한금융과 KB금융(105560)도 유동성 위기는 없다는 점을 해외 당국과 투자자에 전하고 있다.
탄핵 국면에서 원화 가치 하락으로 국내 금융사의 건전성이 악화할 수 있다는 글로벌 시장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은행의 핵심 건전성 지표인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은 환율이 높아질수록 낮아지는 구조다. 원·달러 환율이 10원 높아질 때마다 금융사의 BIS 자기자본비율이 약 0.01~0.02%포인트 낮아지는 것으로 추산된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은행권의 BIS 자기자본비율은 국제 기준에 비춰서도 높은 편이지만 해외투자자들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환율 지속은 배당 축소로 이어져 국내 금융사에 대한 해외투자자의 투자 유인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지주의 배당 여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인 보통주자본비율(CET1) 역시 환율이 뛰면 반대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금융지주 관계자는 “한국 금융지주들이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계획을 발표하며 CET1 비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해외투자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내년에는 국내 금융사들의 실적 전망이 밝지 않다. 금융지주들은 올해 가계대출 급증과 대출이자 인상 영향으로 실적 신기록을 세웠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상황은 다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NIM은 올 1분기(1.63%)에서 2분기(1.60%), 3분기(1.52%)로 갈수록 하향 추세다. 내년에는 가계대출을 중심으로 한 이자이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P 리스크’가 아니더라도 금융권이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김영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은행권은 성장 동력을 찾기 힘든 상황에서 주주 환원까지 강화해야 하는 ‘사면초가’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금융사들은 P리스크 장기화가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이미 수립을 마친 내년 경영 계획에 각종 리스크를 반영해 보수적으로 잡은 만큼 위기 대응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지속적으로 시장을 모니터링하며 비상 대응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려해 대응 전략을 마련했다”고 전했고 다른 금융지주 관계자도 “탄핵 정국 장기화가 내년 사업 계획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지만 시장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