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지겨운 ‘국민’ 타령

정치권, 국민 내세워 상대 진영 공격

尹 “함께 싸우자”며 국민 분열 부추겨

與 쇄신커녕 보수 지지층마저 쪼개

英 보수당 ‘하나의 국민’ 교훈 배워야


1940년대 일본 극우 제국주의자들은 황국 신민으로서 본분을 저버렸다며 일부 국민들을 ‘비국민’이라고 불렀다. 사회주의자·반전주의자 등은 물론 천황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인, 전시 동원 체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장애인 등도 포함됐다. ‘국민 자격이 없다’라는 낙인 아래 온갖 억압이 정당화됐다. 구소련의 스탈린 정권, 중국의 마오쩌둥 정권, 북한 김일성 정권 등은 평범한 인민들에게도 ‘인민의 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사회적으로 매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민’만큼 오염된 단어도 드물다. 여야 정치권은 국민을 내세워 상대편을 공격한다. 극렬 정치 팬덤들은 시민 개개인으로서의 국민, 특정 세력으로서의 국민, 국가 자체를 뜻할 때의 국민 개념을 섞어가며 진영 이익을 공적 이익으로 포장한다. 관공서를 찾은 악성 민원인들조차 “국민을 뭘로 보느냐”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고 했다. 대통령이 됐으니 겉멋 한번 내보자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그는 집권 내내 “국민의 명령”이라며 보수 세력에 대한 적폐 사냥으로 일관했다. 결국 국민들을 두 동강 내면서 정권도 넘겨줬다. 윤석열 대통령은 12일 대국민 담화에서 “비상계엄은 통치행위”라고 강변한 뒤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며 국민 분열을 부추겼다. 윤 대통령에게 탄핵을 찬성하는 대다수의 국민은 국민이 아닌 셈이다.



영국 보수당은 전신인 토리당까지 포함하면 세계 최장수 정당으로 190년째 ‘보수’라는 당명을 유지하고 있다. 생명력의 기원은 19세기 후반 ‘보수당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디즈레일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디즈레일리가 내건 슬로건이 ‘하나의 국민(one nation)’이다. 그는 빈자와 부자, 즉 ‘두 개의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노동자의 권리 보호, 사회 개혁 등 기존의 보수당 정체성에 어울리지 않는 정책들을 폈다. 이런 유연성 덕분에 보수당은 노동 계급과 중도층을 포괄하는 대중정당으로 거듭났다. 집권 기간 역시 영국 노동당보다 훨씬 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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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수 세력도 한때 진화 능력을 보인 적이 있다.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 파동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성장 중심 전략에서 공정 사회로 화두를 바꿨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진보 세력의 의제를 모방한 경제 민주화를 내걸고 집권에 성공했다. 복지사회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커지자 좋건 싫건 보수의 선진화 담론을 버리고 시대적 변화를 수용했던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역대 최소인 0.73%포인트의 격차로 당선됐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에 염증을 느낀 중도와 일부 진보 시민들까지 끌어모은 결과였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세계화 부작용 등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한데도 공동체 강화라는 보수의 근원 가치를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국정 철학으로 내세운 자유민주주의는 약육강식에 가까웠다. 더구나 산업화 세대가 저물고 민주화 세대가 사회 주류가 됐는데도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고집하다 자멸하고 말았다. 보수의 자산으로 평가받던 유승민·이준석·안철수 등이 곁을 떠났고 검찰 수하이던 한동훈과는 견원지간이 됐다.

요즘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지율에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사법 리스크 등으로 이 대표의 지지율은 민주당의 지지율보다는 훨씬 낮다. 중도층에서는 “그래도 이재명은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누구보다 정치적 후각이 발달한 이 대표는 외연 확장을 위해 중도 우클릭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당명에 ‘국민’을 붙인 국민의힘 주류는 어떤가. 당 지지율이 민주당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사과 한 번 없고 극성 지지층 눈치만 보고 있다. ‘금배지’를 지키려고 ‘친윤 지역당’을 자처한다. 이런 사이 보수 세력마저 ‘두 국민’으로 쪼개지고 있다. 쇄신 능력은 고사하고 정권 재창출 의지 자체가 있는지 의문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보수가 퇴행하면 진보의 혁신과 자기 반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좌우 간의 정치적 균형이 깨지면 국가 미래는 추락하게 된다. 그 피해는 정치권이 입만 열면 들먹이는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최형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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