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검에는 ‘Aut Caesar, Aut Nihil(카이사르)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교황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 정복을 꿈꾼 풍운아 체사레 보르자는 16세기 이탈리아를 뒤흔든 야망의 화신이었다.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그가 로마냐 지방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잔혹한 심복을 총독으로 앞세워 토착 세력을 제거하고 정국을 안정시킨 뒤 총독을 잔인하게 처형해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대중적 지지를 얻은 일화는 유명하다.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간교함을 갖춘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은 마키아벨리는 보르자를 이상적 군주의 모델로 삼아 ‘군주론’을 집필했다. ‘군주는 혐오스러운 일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인기를 얻는 일은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보르자의 냉혹한 전략을 연상시킨다.
보르자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 역시 ‘악역’은 남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른바 ‘굿 캅 배드 캅’ 전략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재정 문제를 놓고 민주당과 첨예하게 대치하는 공화당 의원들을 백악관에 초대해 토론을 하며 포용적이고 합리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날을 세워 공화당을 비난하고 정책을 밀어붙이는 ‘배드 캅’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 등의 몫이었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도 자신을 ‘굿 캅’으로 만들어줄 ‘배드 캅’이 있었다. 1기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존 볼턴의 호전성은 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대로 보이게 만들었다.
우리 경제계의 시선에서 본다면 이재명 대통령 만한 ‘굿 캅’도 없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올해 1월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에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념과 진영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고 ‘실용’과 ‘성장 중시’를 선언한 뒤로 눈에 띄는 ‘우클릭’ 행보로 친기업·친시장 이미지를 쌓으며 민주당 정권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기업들을 다독여 왔다. 대통령 취임 전에는 민주당이 반대하는 ‘주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에 대해 ‘그게 왜 안 되지’라며 전향적 입장을 보였고 산업 현장에서는 대기업 세액공제 확대를 시사했다. 트레이드마크인 ‘기본사회’ 담론은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취임 후에도 이례적인 속도로 대기업 총수들과 만나 “경제의 중심은 기업”임을 강조했고 규제 철폐를 약속했다. 산업계의 숙원인 금산분리 완화, 상속세 개편도 약속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 대통령이 말한 대로라면 탄탄대로가 뻗어 있어야 할 기업의 앞길에는 여전히 가시덤불이 무성하다. 이 대통령이 정부와 기업 ‘원팀’을 강조하는 와중에 정부와 민주당은 기업들이 강력 반발한 노란봉투법과 상법, 더 센 상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이제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3차 상법 개정안까지 일사천리로 처리할 태세다. 반도체특별법에서는 끝내 ‘주52시간 예외 적용’ 조항이 빠졌고, 법인세율은 1%포인트 일괄 인상됐다. 상속제 개편도 정부의 장기 과제로 밀려났다. 그나마 금산분리 규제는 증손회사에 대한 의무 지분을 현행 100%에서 50%로 낮추는 선에서 완화 방침이 정해졌지만 공정거래위원장과 여당의 ‘대기업 특혜’ 프레임 때문에 새로운 기업 규제가 도입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대통령과 당정의 단순한 ‘엇박자’로 보기에는 일관되게 반복되는 패턴이 보인다. 대통령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친기업 지도자를 자처하며 지지율을 높이는 사이 ‘배드 캅’ 역할을 맡은 당정이 애초에 의도됐던 ‘기업 옥죄기’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비판이 억지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굿 캅 배드 캅 전략’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신뢰 훼손이다. ‘배드 캅’에게 뒤통수를 맞는 일이 반복된다면 ‘굿 캅’의 듣기 좋은 말을 누가 믿겠나. 대통령의 말이 무게를 잃고 ‘우클릭’이 정책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깨지면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경제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장밋빛 약속만으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허니문 기간’은 이미 끝났다. 이제는 당정을 설득해 약속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