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녹색’ 보조금에 대한 의존은 미국을 (중국 등) 적대국들이 통제하는 공급망에 종속시켜 국가 안보를 위협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올 7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상 전기차·배터리 관련 보조금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을 담은 ‘크고 아름다운 법안(OBBBA)’을 발효하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중국이 전기차·배터리 공급망을 장악한 상태에서 자국 내 관련 산업에 대한 지원은 결국 중국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트럼프의 주장과 달리 미국 전기차·배터리 업계는 이미 중국 기술과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의존도는 더욱 심화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전기차 사업에서 사실상 발을 뗀 미국 포드의 결정에 중국 배터리 기술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했다. 포드는 주력 전기차 모델인 F-150 라이트닝 픽업트럭의 생산을 중단하고 그동안 전기차에 투자한 195억 달러(약 28조 2770억 원)를 전액 손실 처리하는 대신 배터리에너지저장장치(BESS) 사업을 확장하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전기차 구매 시 대당 7500달러씩 지급되던 전기차 보조금을 9월 말로 중단하는 등 지원이 끊기자 더는 수익성을 유지할 수 없다며 내린 결정이었다.
블룸버그는 포드가 2023년 중국 CATL로부터 LFP(리튬·인산·철) 배터리에 대한 기술 사용권(라이선스)을 획득한 덕에 사업 전략을 뒤집는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짚었다. 포드의 리사 드레이크 전기차 시스템 담당 부사장이 이달 15일 사업 재편을 발표할 때 “앞서 획득한 기술 사용권에 100년 넘게 이어져온 대규모 생산 경험을 더하겠다”며 자신감을 나타낸 배경이기도 하다. 포드는 SK온과의 합작법인(블루오벌SK)을 청산하며 단독으로 소유·운영하기로 한 켄터키 공장에서 BESS용 배터리를 생산하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CATL과의 라이선스 계약이 포드가 미국 BESS 시장에서 안착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드레이크 부사장도 최근 별도의 발언에서 “자체 연구를 통해 LFP 배터리 기술을 확보하려면 10년은 걸렸을 것”이라고 인정했을 정도다. S&P글로벌에 따르면 LFP 배터리는 지난해 미국에서 가동을 시작한 BESS 프로젝트 가운데 95%(설치 용량 기준)를 차지했을 정도로 현지에서 보편화됐다.
포드의 사례는 미국 배터리 시장이 중국 기술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내에서도 트럼프 행정부의 지원 중단,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관세 상향 등을 이유로 중국산 부품을 공급망에서 제외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일례로 현재 미국 BESS 업계를 주도하는 테슬라 역시 중국산 배터리 사용을 줄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테슬라가 미국 네바다주에 구축한 메가팩 전용 생산라인은 포드와 마찬가지로 CATL과 라이선스 계약으로 사용권을 확보한 LFP 배터리 기술이다. 외신들은 IRA 규정상 세액공제를 받기 위해 CATL이 미국 기업들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 ‘우회로’를 택했던 것이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블룸버그는 “미국 기업들이 배터리와 부품의 자국 생산을 늘리고 있지만 이것이 미국이 중국과의 ‘녹색 기술’ 경쟁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라고 분석했다. 결국 원천 기술에서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너럴모터스(GM)는 한발 더 나아가 관세(25%)를 무릅쓰고 중국 LFP 배터리 수입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GM은 올 8월 관세를 부담하는 것이 수입 배터리를 사용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라고 주장해 관련 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블룸버그NEF에 따르면 중국산 LFP 배터리는 현재 ㎾h(킬로와트시)당 84달러로 북미와 유럽산보다 40~50%가량 저렴하다. 독일 도이체벨레는 “트럼프 행정부의 화석연료 중심 정책은 미국 전기차와 배터리 시장을 중국에 내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