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데자뷰를 가리켜 일각에서는 기억장애의 일종이라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초차연적 현상이라 말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카레이싱대회의 관중석에 앉아있던 닉은 갑자기 불길한 전조를 보게 된다. 자동차들이 연쇄 충돌을 일으켜 건물이 무너지면서 자신과 친구들을 덮치는 끔찍한 환상이 과거의 기억처럼 생생히 스쳐간 것.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닉이 친구들을 이끌고 경기장을 막 빠져 나오는 순간, 그의 환상은 이내 현실이 된다.
이는 인기 공포영화 '데스티네이션'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일종의 예지력을 발휘하는 주인공은 사고를 모면한 친구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해 보지만 안타깝게도 차례로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알 수 없는 기시감
영화 속 예지력과는 다소 다르지만 분명 처음 맞닥뜨린 상황과 처음 와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듯한 익숙한 느낌을 받는 것을 데자뷰(Dejavu)라 부른다.
'이미 봤다'는 의미의 프랑스어로서 우리말로는 기시감(旣視感)이라 표현한다. 이러한 데자뷰는 빙의, 예지, UFO 목격, 외계인 납치 등 과학적으로 증명키 어려운 대다수 미스터리들처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데자뷰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길을 가다가, 밥을 먹다가,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데자뷰가 찾아온다. 시쳇말로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음모론적 현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대개의 사람들은 데자뷰를 겪을 때마다 꿈속에서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느낌이 너무나도 선명할 때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을 뿐 정말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 빠져든다.
과연 데자뷰는 왜, 무엇 때문에 나타나는 것일까. 데자뷰를 학술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사람은 1900년 프랑스의 의학자 플로랑스 아르노로 알려져 있다. 이후 초능력을 연구하던 심리학자 에밀 보아락이 1917년 자신의 저서 '초심리학의 장래'에서 데자뷰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보아락은 데자뷰가 뇌의 신경화학적 요인, 즉 뇌의 이상에 의해 유발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데자뷰의 실체가 명확히 증명된 바는 없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감각의 문제라는 점에서 실체 규명이 쉽지 않으며 실험을 통해 데자뷰를 인위적으로 재현할 수도 없다는 점이 과학적 연구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가 됐다는 분석이다.
항간의 풍문으로는 데자뷰를 연구한 보 아락도 오랫동안 데자뷰를 경험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 현상의 원인이 기억과 관련된 것인지, 뇌의 비정상적 작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혹자들의 주장처럼 초현실적 현상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다만 그에 대한 가설들은 매우 다양하다.
기억의 변조
데자뷰에 대한 가장 일반적 견해는 기억의 재현 혹은 변조로 보는 것이다. 뇌는 방대한 기억을 수용하며 잠깐 지나 친 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뇌세포 속에 저장한다. 하지만 뇌는 경험을 기억하는 일에 자신의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경험의 전체가 아닌 핵심적 정보만 저장한다.
또한 모든 경험을 의식적 단계에 저장해 놓지도 않는다. 자주 꺼내 쓰는 중요한 기억들을 제외한 대다수 경험은 무의식에 넣어 둔다. 이 무의식적 기억은 그와 유사한 경험을 다시 하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깨우쳐지는 등 외부 자극에 의해 되살아난다.
오랜 만에 친구를 만나 학창시절 얘기를 하다보면 잊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데 이것이 무의식적 기억이 의식화되는 과정이다. 많은 학자들은 데자뷰 역시 이 같은 무의식적 기억의 하나로 본다. 특히 무의식적 기억으로 저장되는 과거의 정보는 실제 생활에서 직접 경험한 일뿐만이 아니라 책이나 TV 등에서 보고 들은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매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 단순한 생활패턴을 지녔던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자주 데자뷰를 겪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와 관련 오스트리아 로젠휘겔신경과학연구소의 조셉 스팟 박사는 '패턴인식' 가설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자극이 비슷하면 활성화되는 뉴런도 비슷하다. 따라서 신경 파장의 비슷한 발화 패턴이 조금 다른 경험을 데자뷰처럼 친숙한 경험으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뇌의 기억저장 메커니즘과도 맞닿아 있다. 뇌는 경험을 간략화시켜 기억으로 저장하므로 주요 특징이 유사하면 동일한 경험처럼 오해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물론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이 가설은 "이 사람은 누군가와 닮았는데?", "여기 분위기가 어딘가와 비슷한데?"와 같이 우리의 또 다른 일상적 느낌과 데자뷰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가 설 자체가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닮았다는 느낌과 데자뷰에는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뇌의 근본적 발화 패턴은 동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스팟 박사는 데자뷰를 놓고 뇌의 신경세포가 전혀 다른 자극을 동일한 것인 양 잘못 반응하여 발화한 것, 다시 말해 기억의 오류라며 자신의 가설을 보완하기도 했다.
뇌의 착각
이와 유사한 다른 가설도 있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만 기억하려는 본능이 있고 심지어 자기 취향에 맞도록 사실을 꾸미기도 한다는 점에서 기억의 변조가 일어나 데자뷰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심리적으로 데자뷰를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사 람은 보통 처음 경험하는 일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 어서 본능적으로 이미 경험한 일이라고 자기 암시를 걸어 두려움을 떨치려고 하며 이 과정에서 데자뷰가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몇몇 심리학자들은 데자뷰가 인간의 내면 깊숙이 감춰져 있던 소망이나 욕구가 돌출되는 소망실현의 수단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자신이 오래도록 간절히 원한 경험이라면 비록 그것이 처음이라도 낯설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의학계는 어떨까. 이들은 이성적·과학적 관점의 분석을 위해 기억 및 심리적 요인보다는 신경화학적 요인에 주목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가설은 뇌의 활동을 통해 데자뷰를 설명하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대뇌 측두엽의 해마 부위에서 입출력 과 정을 거쳐 형성된다. 측두엽은 두뇌의 양옆, 즉 귀의 안쪽 윗부분에 해당되는 뇌 영역이며 측두엽 안쪽에 해마방회(海馬傍回)가, 그보다 더 안쪽에 해마가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해마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기억할 때 쓰이는 부위이며 해마방회는 실제 기억과 무관하게 어떤 것 이 친숙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해마 방회가 활발히 작용하면 어떤 특정한 장면을 마치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친숙하게 느낄 수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데자뷰의 근원을 이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견해로 데자뷰 현상이 측두엽 간질과 관련있다는 연구자도 있다. 측두엽에 발작이나 경련이 일어나는 측두엽 간질로 인해 감정 및 기억의 처리 과정을 수행하던 신경세포들이 비정상적으로 활동해 데자뷰가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측두엽 간질 환자들 중 만성적인기시감을 호소하는 사람 이 유독 많다는 연구 결과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느끼는 데자뷰는 이들 환자들의 발작 증세와는 큰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앞서 언급됐던 가설들이 특정한 외부의 자극에 의해 데자뷰가 유발된다고 주장하는 것에 반해 측두엽 간질 이론은 외부 자극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경화학적 요인에 기반한 몇몇 가설들은 어느 측면에서 데자뷰를 뇌질환의 일종으로 본다 고도 말할 수 있다. 이는 처음 데자뷰를 명명했던 보아락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0.025초의 오차
이처럼 두뇌와 직접 관련된 가설들로 미뤄 볼 때 데자뷰 경험 빈도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잦거나 강도가 심하다면 어떤 병증을 의심해 볼 수도 있다.
가령 전문가들은 정신질환자의 경우 일반인에 비해 데자뷰 현상을 자주 겪고 그 기간도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환청, 망상 등 기타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 데자뷰는 불안장애, 해리장애, 기분장애, 성격장애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서 주로 관찰된다고 밝힌 연구도 있다.
당시 연구에서는 그 원인이 주로 피로감, 스트레스 등으로 진단됐다. 한편 이 같은 여러 경우의 수에 덧붙여 데자뷰와 정신적 혹은 신경화학적 작용은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물리학자 C.존슨 박사가 내놓은 시각과 관련한 가설이다.
이 가설의 지지자들은 데자뷰를 단지 눈과 연계해 해석하고 있다. 사람의 두 눈은 동시에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시간차가 있으며 이러한 차이로 인해 뇌가 데자뷰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가설의 핵심이다. 구체적으로 인간이 바라보는 사물은 두 개의 눈을 통해 뇌 뒤쪽의 시각피질로 전달된다.
그런데 두 눈의 시각 경로에 서 전달되는 정보의 속도가 서로 다르고 시각피질로의 정보 도착 시간이 0.025초 이상 벌어지면 뇌가 두 정보를 하나로 통합하지 못해 별개의 정보로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먼저 도착한 정보 속에 어떤 원인에 의해서든 '언제'라는 정보가 누락됐다면 뇌는 그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인지하게 돼 0.025초 늦게 동일한 정보가 도착했을 때 데자뷰를 일으킨다는 것이 존슨 박사의 판단이다.
데자뷰를 유발하는 양안 의 정보전달 시간차이가 0.025초라는 점에서 일명 '0.025초 지연설'이라고도 불린다. 0.025초는 어떻게 계산된 수치일까. 명확한 근거는 알 수 없지만 존슨 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독립된 두 개의 사건도 0.025초보다 짧은 시간차를 갖고 시각피질에 전달되면 뇌가 하나의 사건으로 인지하고 0.025초를 넘어서면 동일한 사건도 별개의 사건으로 인식된다"고 밝혔다.
더불어 존슨 박사는 한쪽 시신경이 무리를 하면 재충전이 시간이 필요해 다른 쪽 시신경과의 정보 전달 속도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가설도 허점이 있다.
일련의 과학자들이 직접 실험을 통해 한쪽 눈의 시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일반인보다 데자뷰 경험 빈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결과를 도출했지만 이는 곧 한쪽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어쨌든 데자뷰를 겪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생의 체험
데자뷰를 둘러싼 이러한 가설들을 보면 하나 같이 그럴 듯 하지만 그렇다고 속시원한 해답을 주는 것도 없다. 바로 이런 틈새를 파고 든 것이 초자연적 논제로 데자뷰를 풀이하려는 시도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대개 전생이라는 개념을 들이댄다. 현생을 살기 전 전생에서 겪었던 일이 데자뷰로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들에게 데자뷰는 환상이 아닌 과거인 셈이다.
또한 다중우주론도 데자뷰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용어다. 이는 무수히 많은 동일한 우주가 평행적으로 존재한다는 가설로서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나'가 봤거나 경험한 것을 무의식적 교감을 거쳐 자신의 경험으로 인지, 데자뷰가 촉발된다는 설명이다.
30년 전 사망한 사람의 삶을 똑같이 살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 '평행이론'도 이에 그 이론적 근간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와 같은 초자연적 영역의 가설들은 객관적 정보가 전혀 없어 타당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실험으로 증명할 방법은 더더욱 없다.
따라서 세인들의 흥미를 끄는 '설'로만 회자될 뿐이다. 참고로 데자뷰와는 정반대 개념으로 늘 겪는 익숙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 낯설어 보이는 자 메뷰(Jamais vu)가 있다. 데자뷰에 비해 경험자가 많지 않기에 그만큼 알려진 바도 더욱 없다. 현대에 들어 기억상실 증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움직임이 있지만 아직은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다.
눈부신 과학·의학기술 발전을 이뤄낸 오늘날까지도 이 지극히 일상적인 현상들은 질병인지, 단순한 착각인지, 아니면 초자연적 현상인지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탓인지 데자뷰와 자메뷰는 현재 친구들과의 흥미로운 담소 주제나 SF영화의 소재일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먼 훗날에는 우리 자신을 보다 심도 깊게 이해하고 탐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박소란 기자 psr@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