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학창시절 문제아가 광고계 기린아 되다

[INTERVIEW] 두산가 4세 박서원 빅앤트 대표


빅앤트 박서원 대표는 두산 박용만 회장의 장남이다. 하지만 그는 재벌가 후손이란 점 말고도 주목할 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박 대표는 2009년 세계적인 광고제를 휩쓸며 혜성처럼 광고계에 등장 했다. 디자인을 공부한 지 4년 밖에 되지 않은 신출내기, 그것도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병이 광고업계가 깜짝 놀랄 만한 일을 낸 것이다. 사람들은 늘 그랬듯이 그저 '깜짝 스타' 가 탄생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의 집안 배경에 더욱 주목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1 년 뒤 국제 광고제에서 다시금 트로피를 거머쥐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를 만나 '학창시절 문제아' 에서 '진짜배기 스타' 가 되기까지 험난했던 여정을 들어봤다. 정운섭 기자 sup@hk.co.kr Photograph by LEE JONG CHUL

학창시절 공부하기 싫어 놀았다. 싸움도 곧잘 하고 나이트클럽도 다녔다. 대학에 갔지만 수업 대신 여행을 다녔다. 재적 위기에 몰리자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떠났다. 방황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디자인이 배우고 싶어졌다. 무작정 공부를 시작했지만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깊이 빠져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친구 몇 명과 작은 광고 회사를 세웠다. 3년 후 세계적인 광고제를 휩쓸며 일약 스타 광고제작자로 떠올랐다. 그가 손 대는 작업마다 히트작이 탄생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재벌가 출신이었다.

문제아에서 스타가 되기까지, 드라마 같은 인생 역전 스토리에 박수를 치던 세상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은 담담한 모습이다. '든든한 배경이 없었어도 자신이 반드시 성공했을 것' 이라며 자신감을 보인다. 2006년에 만든 작은 광고 회사를 3년 만에 한국middot;미국middot;중국에 지사를 둔 다국적 광고회사로 성장시킨 박서원(32) 빅앤트 인터내셔널 대표에게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이유를 물었다.

53명 중 50등... 싸움질도 했다

"글쎄요.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자신 있게 미칠 수 있는 성격 때문이 아닐까요?" 박 대표는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잔다. 오전 10시쯤 시작하는 하루 일과는 다음 날 새벽 해가 뜰 무렵이 돼야 끝난다. 그것도 일이 많지 않을 때다. 일이 많으면 한숨도 못 잔다. 세상일은 혼자 다 하는 사람 같다. 박 대표는 말한다. "사무실 직원들도 저와 마찬가지입니다. 광고업계 종사자 대부분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게 보통이지만 저희 회사 식구들만큼 일하는 친구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정말 이 일을 좋아해서 미치지 않고 선 버텨낼 수가 없죠."

이런 박 대표가 학창시절엔 노는 것에 미쳤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문제아였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엔 반에서 53명 중 50등을 해본 적도 있다. 3학년이 되서야 대학 진학을 위해 부랴부랴 수능 준비에 매진해 단국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갔지만 다시 공부와 담을 쌓았다. 툭하면 수업을 빼먹고 친구들과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나이트클럽에 가곤 했다. 놀기 위해서 건설현장에서 벽돌을 나르며 돈을 번 적도 있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놀았다.

박 대표는 말한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리곤 밤새도록 나이트클럽에서 신 나게 놀았죠. 그리고 아침에 집에 들어갔는데 부모님께서 안 계신 거예요. 알고 보니 도서관 앞에 가 계셨지요. 엄청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입학한 지 1년 만에 대학을 자퇴하고 2000년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에 위치한 미시간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적성에 맞는 전공을 찾고 싶어서 사회학, 심리학, 기계공학으로 전공을 3번이나 바꿨다. 그 사이에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일이 일어났다. 디자인과의 만남이었다. 박 대표는 말한다. "친하게 지내던 시각디자인학과 일 본인 친구가 어느 날부터 보이질 않아 집으로 찾아갔더니 종이로 우주선을 만들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그냥 노는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수업 과제였습니다. 신선한 충격이었죠. 공부도 저렇게 즐겁게 놀이처럼 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다음 날부터 바로 디자인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강의를 들을수록 욕심이 생겼다. 두 번째 대학 자퇴를 결심했다. 귀국 후 병역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날아간 2005년. 26세의 나이로 뉴욕에 위치한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School of Visual Art' 그래픽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제대로 배우겠다는 각오 때문이었다.

26세 때 시작한 미술

디자인 전공자에게 미술은 필수다. 하지만 박 대표는 남보다 시작도 늦은 데다 미술은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 그가 택한 방법은 오로지 미친 듯이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것이었다. "교수님께서 과제 하나 내주시면 저는 20~30개씩 더해갔어요. 책을 한 권 만들어 오라고 하면 저는 20권을 만들어 갔죠. 제가 그렇게 하니까 나중에는 주변 친구들까지 자극을 받아서 과제를 더 해오더라고요. 힘이 들기도 했지만 난생 처음 수업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올라가니 수업을 따라가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수업 때 진행했던 디자인 프로젝트가 하나둘 경험으로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응용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다. 좀 더 재미있어 보였던 광고분야로 눈을 돌리게 된 것도 그때였다.

보통 국내에서 대학생들이 광고분야 일을 하기 위해선 공모전이나 광고제를 준비한다. 그런데 광고쪽 일을 하기 위해 박 대표가 택한 방법은 창업이었다. 이제 막 디자인에 입문한 데다가 광고분야 경험도 전무했던 상황에서 다소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었다.

국내 대형광고기획사에서 근무하는 한 관계자는 말한다. "국내에선 수많은 기업이 대학생과 광고 지망생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열고 있습니다. 유명 공모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수록 좋은 광고기획사에 취업할 수 있 는 확률이 높죠. 그렇지 않고 일반 대학생이 광고회사를 만든다는 것은 그냥 학창시절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실제로 살아남을 수 없 는 게 현실입니다. 물론 한국과 미국 광고시장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유명 광고 공모전 입상을 통해 데뷔하는 과정은 비슷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박 대표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공모전이나 광고제를 준비하는 것에는 특별히 관심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친구들끼리 통장 하나 개설해서 만든 회사인데 망할 걱정이 뭐가 있겠어요.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돈으로 구입한 컴퓨터는 그대로 쓰면 되니 망해봤자 손해 볼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 오히려 더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무엇보다 실력 있는 친구들에 대한 믿음이 컸죠."

학교에서 제일 실력이 좋기로 소문난 친구 4 명을 불러 모았다. 자취방에 모여 우선 아이디어부터 짜냈다. 하루에 두세 시간 잠을 자며 내놓은 결과물을 들고 거기에 어울리는 기업에 직접 제안을 했다. 광고주를 쫓아다니며 광고 수주를 받아 작업을 진행하는 기존 광고회사를 흉내 내기엔 일손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따라 한다는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몇 기업으로부터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수익이 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빅앤트 인터내셔널 Big Ant International' 이라는 회사를 만들게 됐다. 이후 3 년간 학업과 사업을 병행한 박 대표는 'ALL A ' 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두 번의 자퇴와 세 번의 전과 끝에 비로소 미치 도록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결과였다.

그런데 왜 하필 '큰 개미 Big Ant' 일까. 박 대표는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개미라는 곤충이 지닌 성실한 이미지가 좋았습니다. 개미의 색감과 생김새가 전하는 매력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런데 그냥 개미라고 하면 왠지 좀 작아 보여요. 기왕이면 광고 시장을 이끌어보자는 의미에서 큰 개미라 고 지었죠."

사실 빅앤트 인터내셔널은 광고를 기획middot;대행하기만 하는 광고 회사가 아니다. 광고 회사 형태를 띤 크리에이티브 컨설팅 펌 Creative Consulting Firm 이라고 해야 맞다. 의뢰받은 제품의 전략이 될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만들어 주는 일을 한다. 의뢰받은 제품의 이름을 짓는 작업부터 브랜드 포지셔닝과 같은 디자인에 관한 모든 창작업무를 진행한다. 한 마디로 광고 제품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돕는다.

박 대표 역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Creative Director로 불린다. 그는 주로 빅앤트가 대중들에게 전달할 메시지의 큰 흐름을 결정하는 일을 도맡았 다. 제품과 관련된 수백 가지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아이디어 가 지닌 가치를 신속하게 판단해 작업 능률과 속도를 올렸다. 오케스트라 지휘자 역할을 맡은 셈이다.

눈 떠보니 스타

박 대표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가 2009년 6월 마침내 일을 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는 슬로건을 담은 반전 포스터로 전 세계 모든 광고업계가 주목하는 광고제인 뉴욕 원쇼 페스티벌 국제광고제에서 옥외부문 최고상 인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이다. 뉴욕 원쇼 페스티벌은 프랑스 칸 광고제와 미국 클리오 시상식과 함께 세계 3대 광고제로 손꼽힌다.

이 외에도 빅앤트는 이 작품으로 칸 광고제에서 옥외부문은사자상, 영국 최고 광고디자인 공모전인 D&AD에선 본상을 받았다. 뉴욕 원쇼 페스티벌에서 금상을 받은 데 이어 광고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클리오 시상식에서도 포스터 부문 최고상을 거머쥐었다.


이 작품으로 세계 3대 광고제를 포함한 5개 주요 국제 광고제에서 받은 상만 15개에 달했다. 박 대표는 일약 스타 광고제작자로 떠오르게 됐고, 빅앤트는 서울middot;뉴욕middot;베이징에 사무실을 두고 한국middot;미국middot;프랑스middot;중국 인이 모여 일하는 다국적 회사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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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박 대표는 남들 다하는 광고제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어찌된 일일까? 박 대표는 말한다. "2008년 국제 광고 제 수상작 중에 저희가 만든 작품이랑 거의 똑같은 작품이 있었어요. 저희는 2007년에 만들었던 작품이었죠. 인터넷에도 올려져 있던 작품인 데 너무 흡사해서 마치 뺏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럴 바엔 우리 도 출품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광고제를 위해 준비하진 않았습니다. 그럴 여력도 없었고 목 매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출품하게 된 것이 2008년에 제작한 반전포스터 '뿌린 대로 거두리라'였다.

벼락 스타에서 진짜배기로

가로가 넓은 직사각형 모양의 포스터에서 한 군인이 총신이 긴 총을 어딘가를 향해 겨누고 있다. 이 포스터를 전신주에 감으면 긴 총신이 전신주 몸통을 한 바퀴 돌아 총부리가 다시 군인의 뒤통수를 겨누게 된다. 그리고 그 밑에는 '뿌린 대로 거두리라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라는 미국 속담이 적혀 있다. 이 광고는 '폭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반복되는 자살 행위이기에 전쟁은 중단돼야 한다' 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제작됐다.

큰 상을 타면서 박 대표는 벼락 스타가 됐다. 수많은 곳으로부터 정신 없을 만큼 전화와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사업을 해보자', '일을 배워보고 싶다' , ' 광고를 맡아달라' 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받은 이 메일 한 통을 읽고는 새삼 그가 만든 광고가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갖는지 체감하게 됐다.

박 대표는 말한다.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가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미국을 타도하는데 제가 앞장서 달라는 내용이었죠. 반전 포스터가 아무래도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 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박 대표와 빅앤트가 내놓는 작품은 기발하다. 보는 이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포스터를 보는 시간은 평균 0.5초. 빅앤트의 광고에는 복잡하거나 긴 설명이 없어 짧은 순간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인다. 언뜻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을 법하지만 누구나 만들어 낼 수 없는 작품이다. 죽을 만큼 일할 각오가 돼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말한다. "1년이면 수백 명이 넘는 친구들이 일을 하겠다고 찾아옵니다. 그중에 한두 명을 뽑는데, 왔다가 며칠 못 버티고 그만둔 친구들이 20명이 넘어요. 출근하고 하룻밤 만에 도망가는 사람도 봤습니다. 광고업에 대한 환상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는 사람보다는 환상이 깨져서 돌아가는 사람이 태반이다. 광고 일은 겉보기에 자유분방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끊임없이 세상과 사람을 연구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짜내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박 대표는 말한다. "우리가 천재가 아닌 이상 일정 수준에 올라서기까진 정말 죽어라 하는 수밖에 없어요. 작품을 만드는 데 들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은 결과물이 탄생한다는 것은 진리라고 봅니다."

빅앤트 직원들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퇴근 시간은 저녁 6시이지만 이를 지키는 직원은 드물다. 잠을 줄이는 건 기본이다. 일요일에도 돌아가면서 쉰다. 1년에 공식적으로 모든 직원이 쉬는 날은 설날과 추석 하루씩 전부 이틀이다. 말 그대로 죽을 각오로 일을 하는 셈이다. 그런 저력을 모아 만든 광고가 작년 뉴욕 원쇼 페스티벌에서 또다시금상을 받았다. 두산매거진 옥외광고였다. 박 대표는 이때부터 벼락 스타가 아닌 진짜배기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광고는 2009년 8월 서울 논현동 두산건설 사옥의 한 면에 대형 현수막을 설치해 건물 자체를 거대한 책장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크기는 가로 21.5m, 세로 55m에 달하며, 두산매거진이 지난 2007년 동대문 두산 타워에서 논현동 사옥으로 이전한 후 회사를 홍보하기 위해 내놓은 옥외 광고였다.

이 광고는 책장 속에 보그, 지큐, 보그걸, 얼루어, 더블유 같은 잡지들 이 진열돼 있는 모습으로 건물을 책장으로 만든 발상의 독특함과 더불어 잡지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이 잘 표현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메이저 국제 광고제인 뉴욕 원쇼 페스티벌에서 2년 연속 금상을 수상한 것은 한국인으로는 박 대표가 처음이었다. 수많은 국내외 언론과 누리꾼들이 수상 소식을 반겼지만, 그 소식에 가장 기뻐한 이는 박 대표 가족을 비롯한 일가 친척이었다. 두산 오너일가 사람들이다.

아버지 박용만 회장의 격려

"축하축하축하 계속 승승장구하길 바란다. 서원아."(박태원 두산건설 전무) "추카추카!!! 시상식에 그 수도승 옷 입고 가는 거야?"(박진원 두산인 프라코어 전무) "쑥스…" (박용만 (주)두산 회장). 박 대표의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인트위터에 올라온 축하 메시지들이다. 두산 오너일가 사람들은 이른바 '트위터 왕국' 이라고 불릴 정도로 트위터에 열심이다.

박 대표의 부친인 박용만 회장은 이미 널리 알려진 재계의 유명 트위터리언이다. 박 회장을 좇는 팔로워만 무려 9만 6,000여 명으로 2월 15일 현재 트위터 내 기업인/CEO 순위 2위에 올라 있다. 또 박서원 대표(16위)와 박지원 사장(22위)은 30위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들 외에도 박진원 전무, 박태원 전무, 박석원 두산엔진 상무 역시 개인트위터를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박 대표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무렵인 2009년 초 수많은 수상 소식에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가족들이 왜 갑자기 그제서야 축하 메시지를 전달한 걸까. 박 대표는 말한다. "재벌가 출신이라는 말을 정말 듣기 싫었어요. 그래서 대중들과 소통하는 걸 좋아하시는 아버지께도 제가 국제 메이저 광고제에서 상 15개를 타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드렸죠." 결국 박 대표는 짧은 기간 내에 15개가 넘는 상 을 수상했고 그때까지 자랑을 참았던(?) 가족들이 일제히 수상 소식을 반겼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 광고업계에선 빅앤트가 이뤄낸 실적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오갔다.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도 많았다. 박 대표가 민감해 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광고 업계 종사자는 말한다. "두산이라는 배경은 재정적인 걱정 없이 광고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버팀목입니다. 아무래도 작업을 해나가는 데 비교적 보폭이 여유롭고 크지 않았을까요? 실제 국내에 있는 빅앤트 한국지사 규모 (10명)의 광고회사들은 대부분 영세합니다. 당장 다음 달 직원 월급 걱정을 해야 하는 마당에 3~4개월이 걸리는 프로젝트에 과감하게 올인할 수는 없지요."

업계에서는 국내 광고 시장이 이미 포화 상태에 다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빅앤트가 주력하고 있는 옥외광고 시장은 2010년 기준 약 6,500억 원 규모로 전체 광고시장(7조5,000억 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을 뿐 아니라 경쟁까지 치열한 곳이다. 게다가 시장의 절반 이 상을 거대 자본력을 지닌 대형 광고회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12년 차 카피라이터는 말한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아직까지 국내 광고 시장은 폐쇄적인 구조를 지녔습니다. 그래서 보통 대형 광고회사에서 다년간 경험과 인프라를 축적한 경력자가 신생업체를 창업하곤 하죠. 경험 없는 소규모 신생 업체가 오로지 실력만으 로 성공한다는 건 어렵다고 할 수 있어요."

3년 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해 국내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던 박 대표가 이렇게 치열한 국내 시장에서 과연 혼자의 힘만으로 오늘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있었을까. 박 대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을 멈춘 후 이내 입을 열었다. "물론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박 대표는 세상 사람들의 눈이 의식돼서 그런지 두산과 관련한 작업 을 할 땐 조심스럽다고 한다. 일을 많이 맡지도 않지만 그나마 보수도 거의 받지 않는다. 다른 업체로부터 받는 것과 비교하자면 거의 공짜에 가깝다. 박 대표는 말한다. "수없이 생각해봅니다. '만약 내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지금과 같은 꿈을 꾸고 있다면 어떨까?' 역시 결론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반드시 성공했을 겁니다.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수 있겠지요."

경영권 승계는 글쎄...

박 대표가 이처럼 '미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믿고 지지해준 부모가 있었다. 학창 시절 그렇게 공부와 담을 쌓고 지냈지만 시험을 못 봤다고 혼나본 적이 없다. 처음 입학했던 대학 역시 명문대학이 아니었다. 말썽쟁이 맏아들을 둔 부모는 고액 과외를 시켜서라도 자식을 명문대학에 보내려는 다른 재벌가 부모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가 야단을 맞을 때는 오직 도리에 어긋난 생각과 행동을 할 때뿐이었다. "손바닥도 맞고 종아리도 맞아 봤어요.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었어요. 그래도 늘 제가 하는 생각과 행동을 지지해주셨습니다. 군 제대 후 느닷없이 미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네가 정말 해보고 싶다면 해봐야지'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가 해보고 싶은 일에 자신 있게 미칠 수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온라인을 통해 일부 공개되는 그의 재벌가 생활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인 박용만 회장 생일에는 가족이 모여 저녁 식탁에서 작은 케이크를 놓고 촛불을 끈다. 모든 음식은 어머니가 직접 만든다. 가족 식사도 멋진 호텔이 아니라 집에서 먹을 때가 많다. 반찬은 대여섯 가지면 충분하다. 어머니가 아침에 김밥을 만든 날 박 회장이 신 난다며 트위터에 사진을 올리는 정도가 특별한 행동이다.

"평범해서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다" 는 기자의 말에 박 대표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평범하게 보이려는 의도가 아니냐? 유럽에서 온 호텔 주방장 출신 요리사가 만드는 재벌가의 아침 식탁을 기대했다" 는 기자의 말을 듣고선 고개를 들어 소리를 내어 웃는다. 박 대표는 말한다. "그런 건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재벌가에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엔 그런 분들은 없어요. 학창 시절 도시락 메뉴도 밥, 김치, 햄, 계란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평범하더라도 국내 최장수 기업 두산의 최고 경영인 장남이다. 지금이야 자유분방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어도 그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의무가 있을 법하다. 조심스럽게 향후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박 대표는 말한다.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어느 날 미술을 배웠던 것처럼 또 갑자기 다른 일을 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요. 부모님께서도 늘 제게 돈을 많이 벌건 적게 벌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하시고요."

그렇다고 아예 경영승계에 대해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늘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은 그를 자극한다. 구체적으로 확률을 밝혀달라는 기자의 집요한 부탁에 그가 대뜸 말했다. "7~8% 정도? 그 이상은 아닌 것 같네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진짜 매력도 사람입니다. 클라이언트나 직원과 나누는 모든 대화가 즐겁고 신 나니까요. 때론 사람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저는 세상에서 사람이 제일 좋습니다." 현재 박 대표는 (주)두산 지분을 1.63%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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