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토로라 모빌리티 CXD 서울 스튜디오는 글로벌 모토로라 디자인의 중추다. 총괄 센터장을 맡고 있는 황성걸 상무는 모토로라 디자인의 정신이다. 황성걸 상무는 10년 전 모토로라스러움을 정의한 당사자다. 신기주 기자 jerry114@hk.co.kr PHOTOGRAPH BY LEE JONG CHUL
황성걸 상무는 소비자에게 묻지 않는다. 소비자를 읽어낼 뿐이다. 소비자의 욕구를 찾아낼 뿐이다. 황성걸 상무는 모토로라 모 빌리티 CXD 서울 스튜디오의 총괄 센터장이다. 모토로라 모빌리티는 전 세계에 7개 CXD스튜디오를 두고 있다. CXD는 Consumer Experience Design의 줄임말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디자인을 창조하는 곳이다. 7개 CX D스튜디오 중에서도 서울 스튜디오가 제일 중요하다. 한국 통신시장이 워낙 역동적인 덕분이다. 전 세계 휴대폰 디자인 유행을 선도하곤 하기 때문이다. 서울 스튜디오는 모토로라 모빌리티의 디자인 중추인 셈이다. 그런데 황성걸 상무는 정작 소비자에게 묻지 않는다. "소비자한테 의견만 물어봐선 절대로 앞서갈 수 없습니다."
그는 덧붙인다. "물어보겠다면 물어볼 걸 제대로 물어봐야 합니다. 또 물어볼 만한 사람한테 물어봐야 합니다. 흔히 트렌드세터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트렌드 추종자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디자인 경영인이 빠지기 쉬운 오류가 트렌트 추종자들의 유행을 따라가다가 한 발씩 늦는 겁니다.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이면의 욕구나 욕망을 읽어내야 합니다. 소비자들 자신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걸 찾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물어서도 아무한테 나 물어서도 안 되는 겁니다."
황성걸 상무는 한국은 디자인의 감각과 기능은 이미 뛰어나지만 디자인 시장을 읽는 조사방법론에선 아직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고 얘기한다. "미국과 일본에선 1980년대부터 산업디자인에 관한 리서치 방법론이 체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시장을 읽는 법부터 배우고 디자인을 했단 얘기죠. 미국 서부에서 제록스 파크 연구소가 소비자 행동 심리학을 기초로 이런 방법론을 보편화시켰죠. 반면에 한국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뛰어넘어 바로 21세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소비자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없이 디자인만 하기 시작한 거죠."
지금도 한국 기업들은 디자인을 얘기할 때면 기껏 초점이 안 맞는 설문 조사를 들이대기 일쑤다. 황성걸 상무는 그런데도 한국 기업들이 디자인 경영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속도 덕분이었 다고 설명한다. "한국은 제조업 기반이 잘 닦여 있습니다. 디자인 유행을 습득하면 곧바로 제품 개발까지 이어지는 구조죠. 산업화가 아주 잘 돼 있었기 때문에 당장의 디자인 트렌드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겁니다." 황 상 무는 그래서 걱정이다. "이제 속도에서 한국은 중국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여전히 팔로잉하는 B 멘탤리티를 갖고 있어요. 지금이라도 체계적인 디자인 혁신 운동이 필요할 거라도 봅니다."
사실 황성걸 상무야말로 디자인 경영 혁신 운동을 일으켰고 성공시킨 주역이다. 모토로라는 지금 세련된 디자인 역량을 지닌 휴대폰 제조사로 평가받는다. 스마트폰 혁명이 불어 닥치면서 빛이 바래긴 했지만 레이저 열풍은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었다. 팬택의 한 관계자는 "팬택이 무너진 건 레이저 쓰나미 때문이었다" 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모토로라는 우중충한 통신장비나 만드 는 제조 기업이었다. 그런 회사가 디자인 선도기업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건 황성걸 상무가 주축이 된 디자인 혁신 덕분이었다.
황성걸 상무는 11년 전 모토로라에 입사했다. 그때만 해도 모토로라를 이끌고 있던 사람들은 이른바 더블E들이었다. 전기공학과 기계공학 전공자들이 회사의 주축이었다. "그들은 산업디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디자인 변화를 내켜하지도 않았죠.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 서 설득을 하고 다녔습니다." 황성걸 상무 뒤엔 당시 수석 부사장과 부사 장이었던 팀 퍼시 Tim Persey와 피터 패너 Peter Pfanner가 있었다. 팀 퍼시는 애플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황성걸 상무한테 모토로라니스 Motorolaness, 그러니까 모토로라스러움을 정의하라고 주문했다.
황성걸 상무는 말한다. "사실 모토로라스러움을 정의하는 건 오히려 쉬웠습니다. 그걸 조직 전체가 공유하게 만드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렸죠. 아마 공력의 20%를 지침 개발을 하는 데 쓰고 나머지 80%를 대화와 설득을 하는 데 썼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 과정에서 크게 배운 게 있어요. 디자인 혁신은 디자인 전략만큼이나 전술이 중요합니다. 저는 자동차 기업들의 디자인 혁신에서 많은 걸 배운 것 같습니다. 해봐야 절대 안 된다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디자인 제품으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 당시엔 호라이즌 플래닝이라고 부르는 3년 단위의 혁신 전술을 활용했습니다. 단계별로 모토로라디자인 철학을 확산시키는 방식이었죠."
황성걸 상무는 회상한다. "몇 십 년 동안 안테나만 만들어온 분한테 안테나가 없어야 더 나은 디자인이 나온다는 걸 설득하기란 참 어려웠죠. 감성의 가치를 설득하는 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결국 황성걸 상무가 미국 모토로라 본사에서 일으킨 디자인 혁신 운동은 레이저라는 어마어마한 대박 상품으로 결실을 맺었다. 모토로라는 명실상부한 디자인 선두 기업이 됐다. "레이저는 2006년부터 준비한 디자인 부서 내부의 비밀 프로젝트였어요. 혁신 설계와 선행 설계를 함께 진행한 경우였죠. 좀 더 가볍고 슬림한 휴대폰 디자인을 추구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휴대폰 디자인은 안테나가 달린 두꺼운 모습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안테나를 없애고 날렵하게 만들었죠." 모토로라의 레이 저 휴대폰은 전 세계에서 1억 3,000만 대가 팔렸다.
황성걸 상무는 점점 디자이너의 역할이 확장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단순히 제품의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넘어서 제품 생산에 관련한 모든 개념을 디자인하는 문제 해결자이자 경영자로서의 기능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황성걸 상무 본인이 그런 경우다. 미국 본사에서 제품 기획 업무를 담당했다가, 디자인 정체성 운동의 주축이 됐고, 다시 생산본부에서 공장 업무를 배웠다가, 디자인 매니저를 거쳤다. 이젠 CXD 서울 스튜디오의 총괄 센터장으로서 전 세계 모토로라디자인의 흐름을 조율하고 있다. "CXD 서울 스튜디오에는 모두 9가지 파트가 있습니다. 단지 제품 디자인에만 그치지 않고 인터렉티브 디자인부터 선행 디자인까지 다양한 부분을 다룹니다. 모토로라 모빌리티의 두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황성걸 상무는 CXD 서울 스튜디 오가 한국적 디자인의 글로벌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미국 디자인의 흐름은 전략적입니다. 유럽 디자인은 문학적이지요. 한국적 디자인의 강점은 그 둘을 융합한 지점 즈음에 있습니다. 한국이 디자인을 연구하기에 적합한 토양인 건 문화적으로 스토리텔링이 번성하고 있고 그걸 시각화하는 감각도 발달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얼마 전 전세계 모토로라 7개 CX D스튜디오들은 2033년 휴대폰의 미래 모습을 각자 디자인해봤다.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탓에 전혀 다른 미래 디자인이 떠올랐다. 베이징 CX D스튜디오는 중국의 전통을 현대화하는 데 주력했다. 북 미 CX D스튜디오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우주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서울 스튜디오에서 내놓은 건 텐더와 타투라는 이름의 디자인 이었다. 텐더는 일종의 개인 인공위성이다. 타투는 문신처럼 피부에 입힌 휴대폰이다.
황성걸 상무는 설명한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다 보면 경영진 이 서울 스튜디오 제품들에 대해 조마조마해 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스튜디오들이 제품부터 보여주고 얘기를 시작하는 데 반해 서울 스튜디오는 그 제품이 등장하기까지의 사전 이야기부터 풀어내곤 하거든요. 전 그게 한국적 디자인에 맞다고 봅니다. 텐더의 경우 미래에는 온갖 개인 디바이스들을 따로 보관하는 개인 위성이 하나씩 생겨날 것이란 상상에서 출발했어요. 그렇게 상상하게 된 배경이 이야기이고 결국 텐더를 이해하게 만들죠. 금빛 레이저2 럭셔리폰은 클레오파트 같은 인물에서 영감을 얻은 경우입니다. 때론 한 사람이 특정 제품의 페르소나가 될 수 있다는 것 이야말로 한국만의 디자인 특징일 수 있을 겁니다."
황 상무는 덧붙인다. "전 제 감각이 맞다고 봅니다. 사실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보여주면서 경영진이 선택하라고 하는 경우가 더 많죠. 그래야 안전하니까요. 제가 단 한 가지 디자인 시안만 보여 줬더니 누가 그러더군요.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고요. 하지만 그렇게 절충적으로만 가면 변화와 혁신은 늘 어렵습니다. 투표와 다수결은 혁명의 방법은 아니니까요. 제 디자인 철학이 성공한다면 2년 뒤에도전 이 자리에 있겠죠. 아마."
요즘 모토로라는 예전 같지가 않다. 레이저 쓰나미를 일으켰던 2006 년과 2007년의 위세를 많이 잃었다. 한국 시장 점유율만 놓고 봐도 한 자리 숫자까지 떨어진 상태다. 일단은 스마트폰 혁명 때문이다. 휴대폰 경쟁의 중심축이 디자인에서 기술로 다시 이전되면서 디자인 주도권을 쥐고 있던 모토로라가 큰 내상을 입었다. 모토로라뿐만이 아니다. 모토로라처럼 디자인 경쟁력이 탁월했던 LG전자 역시 죽을 쑤고 있다.
하지만 모토로라가 바닥을 치게 된 건 단순히 외부적 충격 때문만은 아니다. 모토로라는 10년 전 내부 디자인 혁신 운동을 통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10년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한번 내부적 혁신이 필요한 단계에 도달했다. 달이 차면 기울 듯 모토로라 역시 변화가 필요한 때란 얘기다. 모토로라가 모토로라 모빌리티와 모토로라 솔루션이라는 두 부분으로 분리된 건 이런 혁신의 일환이다. 산제이 자 모토로라 모빌리티 회장은 통신장비를 만드는 모토로라 솔루션과 소비자들을 위한 휴대폰 제조사인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구분해서 예전의 혁신성과 기동성을 되찾고 싶어한다.
황성걸 상무는 지금의 모토로라 모빌리티의 상황을 타이거 우즈에 비유한다. "타이거 우즈 같은 골프 황제도 스윙 폼을 바꾸면 다시 그 스윙폼으로 우승을 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토로라 역시 스윙 폼을 바꿨습니다. 지금 그 스윙 폼에 익숙해져 가는 상황입니다."모토로라는 지난 1월에 열린 CES에서 모토로라 줌과 모토로라 아트릭스를 선보였다. 새로운 태블릿PC와 스마트폰이다. 두 제품은 CES 2011 어 워즈에서 올해의 제품상을 수상했다. 모토로라 부활의 신호탄인 셈이다.
황성걸 상무는 산업 디자이너의 가장 큰 미덕은 예술적 감각이 아니라 설득의 기술이라고 설명한다. "미적 감각만 갖고 디자인을 한다면 그건 공예가일 뿐입니다. 그 작품을 대량생산에 이르게 만드는 설득력과 협상력을 갖춰야 슈퍼 디자이너가 될 수 있습니다. 재능 있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 부분을 종종 놓치는 게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이미 하나의 산업 단위가 된 지 오래니까요." 모토로라디자인은 절제되어 있다. 진솔하다. 감성적이다. 10년 전 황 성걸 상무가 정의한 모토로라스러움의 요체다.
10년 동안 수많은 모토로 라 제품들이 나왔지만 이 디자인 정체성에서 결코 탈선하지 않았다. 레이 저나 스타텍처럼 성공한 제품도 있지만 스타텍III처럼 기대에 못 미쳤던 제품도 있다. 그러나 성공작이든 실패작이든 모든 모토로라 제품들은 모 토로라스럽다. 황성걸 상무가 주춧돌을 세운 모토로라스러움 위에 지어 졌기 때문이다. 황성걸 상무는 말한다. "자동차를 디자인하면 모든 산업 제품들을 다 디자인할 수 있듯이 이제 휴대폰 역시 디자인 생태계의 맨 끝단에 자리하게 된 듯합니다.
그 제품군 안에서 자기 색깔을 잃지 않는다면 분명 자기 스윙 폼으로 장타가 나오는 순간이 올 겁니다." 황성걸 상무는 모토로라에서 디자인의 시작과 혁신과 상승과 절정과 정체를 모두 경험해봤다. 그렇게 모토로라스러움을 만들었다. 쉽게 사라지지 않을 가 치다. 황성걸 상무의 말처럼 조만간 다시 한번 세상은 모토로라스러워질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