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야전에서 뛰는 경제관료 강고집 메가뱅크 새로운 실험한다

[포춘 코리아 CEO 500]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한국 경제를 현장에서 30년 동안 지켜봤다. 굵직한 경제정책이 마련될 땐 늘 강만수 회장이 있었다. 지금 강만수 회장은 또 다른 현장에 있다. 이제까지 작전 상황실에 있었다면 지금은 야전에 있다.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고집이 있기 때문이다.

신기주 기자 jerry114@hk.co.kr


시 강고집이었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시중 은 행 인수합병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이다. 마땅한 매물이 없는 게 문제였다. 내심 관심을 가 졌던 외환은행은 하나금융지주와 혼담이 오가고 있다. 우리금융지주 인수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우리금융지 주 민영화는 금융계에서도 이젠 아예 고차 방정식으로 분류된다. 지난 3월 14일 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 취임 할 때부터 강 회장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 관론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될 것도 같았다. 이 명박 정부의 회전문 인사라며 손가락질만 받았을 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도 2년 남짓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다. 강만수 회장한테 주어진 시간이 채 2년도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강만수 회장은 손을 놓고 있기보단 무엇이든 시도하는 쪽을 선택했다. 지난 10월 9일이었다. 강 만수 회장은 연합뉴스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 적당한 매물이 나오면 언제든 인수합병에 나선다는 게 일관된 입장입니다. 현재 인수를 추진 중입니다만 상대가 있는 게임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은행인지 얘기하기는 곤란합니다.” 역시 산은금융지주의 강씨 고집이었다. 강만수 회장은 재정경제부에서 일할 때 재경부 강씨 고집이라고 불릴 만큼 뚝심이 셌다. 장관의 명령을 거 부하고 4시간 넘게 버틴 적도 있었다. 우리금융지주 인수 시도가 물 건너갔다고 해서 포기한다면 강만수가 아니었다. 강만수 회장은 슬쩍 암시를 줬다. “해외은행도 두루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계 경 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곧 미국이나 유럽에서 매물이 많이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시중 에선 강만수 회장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해외 시중 은행이 어디냐에 관심이 모아졌다.

강고집
HSBC였다. HSBC 서울 지점은 수도권 7군데 와 지역권 4군데를 합쳐서 모두 11개 지점을 운 영하고 있다. HSBC는 한국에서 소매금융부문 을 접고 기업금융 부문만 운영하기로 전략을 수 정했다. HSBC는 한국에서 별 재미를 못 봤다. 외환은행 인수를 시도한 적도 있지만 론스타 먹 튀 논란에 휘말리면서 접어야 했다. 국내 금융 사들의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한국 소매시장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소매 금융 시장 확대를 위한 교두보가 필요한 강만 수 회장과 이해 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 다. 강만수 회장은 산업은행의 지점망을 2011년 까지 77개로 늘리고 2012년까지 100개로 확대 할 작정이다. 산업은행 지점 수는 현재 60개다. HSBC 서울 지점을 인수한다면 단숨에 71개로 늘어나게 된다. HSBC 서울 지점의 총 수신 규 모는 5조 원 정도다. 산은금융지주의 소매 금융 확대는 벌써부터 금융권 전체를 긴장시키고 있다. 강만수 회장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다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만수 회장은 메가뱅크의 수호신이다. 재경부 와 관세청과 통산산업부를 거쳐 기획재정부 초대 장관까지 지낸 거물이 차관급 금융지주 회장으로 왔을 때부터 메가뱅크 추진은 숙명적인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강만수 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기획재정부 장관에 기용되면서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 로 메가뱅크 설립을 추진했다. 하나금융지주와 우리금융지주를 합병한다거나 산은금융지주를 민영 화시켜 우리금융지주와 몸을 합친다는 식의 메가뱅크 로드맵까지 직접 짰다.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관치 금융의 시대는 끝나 있었다. 강만수 회장이 재무부 강고집으로 통하던 1990년대까지만 해 도 재무부가 한국 금융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조상제한서(조흥 · 상업 · 제일 · 한일 · 서울은 행)라고 불리던 5대 시중 은행의 행장들은 대부분 재무부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었다. 1960 년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금융을 정부 지배 아래 둔 이래 이어져온 관행이었다. 하지만 외환 위기가 금융의 틀을 바꿔버렸다. 주요 금융지주사의 해외 투자자 지분은 평균 70%에 이른다. 정부 가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게 됐단 뜻이다. 메가뱅크를 추진하든 민영화를 추진하든 시장 을 달래고 맞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상황이 돼 버렸다. 강만수 회장은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일 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를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랜 꿈이었던 메가뱅크는 제대로 시도조차 못했다. 강만수 회장은 겉으로는 청와대와 금융당국의 제안을 받아서 고민하다가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산은금융지주를 책임지게 됐다. 하지만 사실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강만수 회장 본인이 민간 금융 지주사행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만수 회장의 주요한 정책 목표인 메가뱅크를 추진하려 면 야전으로 가는 게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다. 어차피 금융의 중심은 이제 관가가 아니라 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다. 청와대와 금융 당국과 코드가 맞는 금융지주 회장이야말로 메가뱅크를 추진하는 데 적격이다. 강만수 회장 스스로가 자신이 입안한 정책의 실행자로 나선 셈이다. 한국 금융시장 판도는 외환위기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격변기로 접어들고 있다. 신한금융지주 와 KB금융지주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하나금융지주가 외환은행을 인수한다면 새로운 실력자로 부 상하게 된다. 우리금융지주가 민영화되면 다시 1990년대 5대 은행 시절처럼 신국하우산이라는 5대 금융 지주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강만수 회장은 산은금융지주를 다섯 번째 실력자로 키울 작정 이다. 이미 기업 금융에선 산은금융지주를 당해낼 자가 없다. 산업은행은 2011년 들어서 모두 1조 2,043억 원 규모의 기업인수합병 금융 대출을 해줬다. 2011년 1월부터 7월까지 전체 인수합병 금융 규모는 3조2,295억 원이다. 산업은행이 전체 시장의 3분의 1을 석권하고 있단 뜻이다. 2위 우리은행 은 4,327억 원 수준이다. 산업은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산은금융지주가 소매 금융 부분만 강 화할 수 있다면 오히려 신한금융지주나 KB금융지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거대 은행으로 도 약할 수 있다. 사실상 상업투자은행(CIB·Commercial Investment Bank)도 가능해진다. 소매 금 융과 투자 금융을 아우르는 모델이다. 강만수 회장이 집요하게 소매 금융 확대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다. 얼마 전 산업은행은 다이렉트 뱅킹을 선보였다. 점포 없이 온라인으로만 거래하는 다이렉트 뱅킹은 지점 수가 적은 산업은행이 시 도해볼 만한 전략이다. 사실 HSCB가 국내에서 한 차례 시도했다가 유야무야됐다. 강만수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국내에선 무점포 다이렉트가 되지 않을 것이란 편견을 깨주겠습니다. 수신 기 반이 취약한 산은으로선 이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꼭 메가뱅크가 아니더라도 산은금융지주로 선 수신 기반 확보가 필수적이다. 민영화가 진행 되면 산업은행은 독자 생존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 금융 기능을 정책금융공사에 넘겨준 상황 에선 철저한 시장 논리로만 싸워야 한다. 개인 소매 금융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승산 이 없다. 강만수 회장은 자신의 메가뱅크 구상 을 이루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산은금융지주의 생존을 위해서도 인수합병 전장에서 꼭 승리를 거둬야 하는 입장이다. HSBC 서울 지점 인수 는 첫 번째 단추가 될 수 있다.

강실세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은 역대 최고의 경제 관 료 가운데 한 사람이다. 5공화국 시절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 가정 교사로 통했던 김재익 수석 은 1980년대 초반 경제 정책의 틀을 잡은 인물 로 꼽힌다. 5공화국의 ‘경제 대통령’으로까지 불 렸다. 김재익 수석은 경제 관료로서 3박자를 갖 춘 인물로 평가받는다. 경제에 대한 통찰력은 기본이다. 필요하면 대통령과 독대를 해서라도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을 지녀야 한다. 국제 적인 비전까지 필요하다. 김재익 수석은 1983년 아웅산 참사로 순국 했다. 김재익 수석은 관료들 사이에서 상징적인 역할 모델로 남았다. 강만수 회장은 김재익 수 석 이후 가장 그 역할 모델에 부합했던 경제 관 료다. 많은 경제 정책은 정치적 뒷받침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다. 그러나 경제 관료한텐 정치 권력이 없다. 정책을 추진하자면 정치적 리 더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강만수 회장은 이 명박 대통령의 경제 가정 교사로 불렸다. 소망 교회 인맥으로 분류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경제 참모로 교류했다. 대선 경제공약도 강만수 회장의 몫이었다. 강만 수 회장은 MB노믹스의 입안자였다. 강만수 회장은 한국 금융을 개방시킨 실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외환위기로 담벼락까지 허물 어지긴 했지만, 정책당국 또한 199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압력 때문에 국내 금융시장의 대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만수 회장은 국제금융국장으로서 미국과의 금융시장 개방 협상을 맡았다. 1991년 3월 한미금융정책회의는 금융시장 개방의 밑그림이 그려진 회의였다. 강만수 회장은 그의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 경제 30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금융정책회의에서 우리는 이곳저곳으로 쫓겨 다니며 미국의 각목에 얻어터지는 형국이었다. 미국의 금융시장 개방 압력은 잘 짜인 작전에 따라 금융 정책 전반에 걸쳐 계속 밀려오는 파도였다.” 강만수 회장은 외환위기 직전이었던 1997년 무렵 재경원 차관이었다. 강만수 회장은 차관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국제수지 개선을 통한 외환 보유고 확보에 맞췄다. 고환율을 통해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외환 관리나 환율은 중앙은행 소관이라는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때마침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알력 다툼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 다. 모피아라고까지 불리는 정통 재무부 관료인 강만수 회장의 설득이 먹힐 리가 없었다. 강만수 회 장은 회고했다. “환율과 외환 보유고를 중앙은행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이것은 정부의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임무는 물가안정이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환율을 평가절상하 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정상적일 때 통상적인 업무는 몰라도 대외균형이 깨질 때는 환율을 중앙은 행에 위임해서는 안 된다. 시장에 맡겨서도 안 된다.” 이명박 정부 초창기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강만수 회장이 보여줬던 정책 방향들 은 정확하게 이때의 경험들에서 나왔다. 강만수 회장은 외환 보유고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 일본과 통화 스와프를 맺었다. 고환율 정책을 유지해서 기업 수출실적을 늘려 잡았다. 중앙은행인 한은을 밀어내고 정부가 공공연하게 환율에 개입했다. 사실 이런 정책들은 MB노믹스의 핵심이었던 747 대 선 공약을 추진하기 위한 비책에 가까웠다. 고환율 정책으로 7% 성장을 이룩하고 그걸 바탕으로 1 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어 세계 7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다는 작전이었다. 결국 이 정책 은 예상과 달리 글로벌 금융 위기 대응책으로 쓰여졌다. 747을 지켜지지 못했다. 강만수 회장으로선 아쉬운 대목이었다. 대신 강만수 회장은 1990년대 등 떠밀리듯 진행됐던 금융시장 개방의 약점을 개선하는 데 치중 했다. 1990년대 미국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강력하게 금융시장 개방을 요구했던 건 월가의 압력 탓 이었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저금리 정책과 규제완화 정책 덕분에 힘을 키운 미국 자산 시장 의 맹주들은 1990년대부턴 신흥 시장으로까지 시야를 넓혔다. 덩치가 커진 메가뱅크의 힘이 얼마 나 가공할만한 것인지 목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 금융시장은 한미FTA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개방할 부분이 없을 정도로 활짝 열린 상태다. 정부가 지켜줄 여지가 그만큼 사라졌단 얘기다. 한국 금융시장 내부의 강자가 시장을 지켜내야만 한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우후죽순처럼 한국에 진출했던 외국계 은행과 사모펀드들은 국내 대 형 금융 지주사들의 위세에 눌려버렸다. 강만수 회장이 산은금융지주를 메가뱅크로 키우고 싶어하 는 건 고집 때문만은 아니다. 산 경험 때문이다.

강뚝심
경제 관료로서 강만수 회장에 대한 평가는 곱 지 않다. 물가 상승을 유발하는 고환율 정책은 기업들한텐 몰라도 서민들한텐 인기 없는 정책 이었다. 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서 강만수 회장 이 민영화를 마무리 짓고 메가뱅크라는 목표까 지 달성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지 않다. 실 제로 강만수 회장을 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 선 임한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지난 6월 14일 산은 의 우리금융지주 인수 참여를 공식적으로 반대 하고 나섰다. 국회 정무위원회 안에서도 공공연 하게 반대 여론이 높은 메가뱅크 정책을 금융위 원장이 지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무위 원회 안에선 강만수 괘씸죄 얘기까지 흘러나왔 다. 우리금융 인수 같은 초대형 국책 사업을 추 진하면서 정무위원들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었 다는 게 이유였다. 청와대조차 인위적인 메가뱅 크 육성에는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메가뱅크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강만수 회장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일이었지만 이젠 정권의 기 류가 달라졌다. 강만수 회장은 이제 인기가 없다. 경제 관료 는 정치적 힘을 잃으면 정책을 추진할 수 없게 된 다. 강만수 회장이 1990년대 후반에 이미 한 차 례 겪어본 일이다. 재경원 차관으로 IMF와의 피 말리는 협상을 주도했지만 결국 외환위기의 주범 으로 몰리면서 도매급으로 쓴소리를 들어야 했 다. 경제 관료는 그렇게 정치적 부침을 겪을 수밖 에 없다. 강만수 회장은 그걸 딛고 부활해서 김 재익 경제수석 이후 최고의 실세 경제 관료로 군림했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강만수 회장의 뚝심 때문이었다. 그는 야인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산은금융지주 회장 으로서 강만수 회장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 역시 뚝심 그 자체다. 옳다고 생각하는 건 포기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본 강만수의 30년은 그랬다. 강고집이었다.


경제 관료는 그렇게 정치적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다. 강만수 회장은 그걸 딛고 부활해서 김재익 경제수석 이후 최고의 실세 경제 관료로 군림했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강만수 회장의 뚝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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