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아폴칼립스적인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켜내길 원하나? 지구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종류의 재앙으로부터 당신의 생명을 지켜준다는 '서바이벌 콘도(Survival Condo)'가 최근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이동훈 과학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21세기형 노아의 방주
얼마 전 미국의 래리 홀이라는 사람이 만든 '서바이벌 콘도'가 국내외 적으로 화제가 됐다.
이 콘도는 미국 캔자스주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사일로를 개조한 지하벙커형 대피 시설로, 아직 완공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양 한 달 만에 7개층의 거주시설이 완판됐다. 1개층의 가격이 200만 달러, 원화로 환산하면 23억원을 호가했음에도 말이다.
사실 위험으로부터 살아남고자 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막론한 당연한 본능이다.
곤충에 더해 박테리아조차 모진 목숨을 이어 가지 위해 항생제에 내성을 갖도록 진화하는 데 하물며 인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구약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 역시 대홍수라는 전 지구적 위기상황에 맞서 삶을 이어가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서바이벌 콘도라 해도 실언은 아니다.
서바이벌 콘도가 입증하듯 이러한 경향은 합리성과 이성, 과학이 지배하는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아니,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미래의 위험 요인을 더 명확히 예견할 수 있게 되면서 위기감과 생존 본능은 오히려 강해졌는지도 모른다.
일례로 동서 양진영 간의 핵전쟁 위험이 상존하던 냉전 시대에는 세계 각국에서 방사능 낙진에 대비한 대피호를 건설하는 게 일종의 유행이었다. 미국의 경우 1962년 '그린 아일랜드(Green Island)' 프로젝트를 런칭, 웨스트 버지니아주에 국회의원 전원과 600명의 직원들이 45일간 생존할 수 있는 물자를 보관한 대형 지하벙커를 건설하기도 했다. 물론 핵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위기상황 발생 시 정부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대피 계획은 어느 국가든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냉전 종식 후에도 인간의 위기감은 핵전쟁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 원전 사고, 소행성 충돌, 쓰나미, 그리고 슈퍼박테리아의 창궐 등이 그것이다.
인류와 문명이 끝장 날 최악의 상황에서도 입주자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민간 대피 시설의 건설이 속속 이뤄지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이 같은 대중적 위기감과 생존 욕망이 어우러진 결과물일 것이다.
자급자족 공동체
서바이벌 콘도는 36~70명의 사람들을 외부의 전력 공급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설계된 지하 대피소다. 태양전지와 150㎾급 풍력터빈, 디젤발전기를 통해 자체적으로 전력 생산이 가능하며 수경재배시설을 통해 70명이 최대 5년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 식량을 제공한다. 심지어 신선한 생선도 키워 먹을 수 있다.
또한 상당기간 동안 특정공간에서 함께 생활해야 하는 개별 입주자들을 공동체라는 틀로 묶기 위해 도서관, 헬스클럽, 의료실, 수영장, 영화관 등 다양한 편의시설도 갖추고 있어 대피 기간 중에도 품격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서바이벌 콘도가 들어서고 있는 미사일 사일로는 미군이 6,000만 달러(2008년 화폐가치 기준)를 들여 건설한 것으로서 사일로 자체가 콘도의 본체가 되면서 그 어떤 건축물보다 막강한 내구성을 자랑한다.
지하 53m에 이르는 건물의 외벽은 기본적으로 철근 콘크리트다. 부위에 따라 두께가 75~270㎝에 달하며 콘크리트 보강용 철근만 600톤이 들어갔다. 또한 이를 에폭시 소재로 보강, 내충격성을 배가했다.
시설은 크게 헬리콥터 착륙장에 연결된 지하 2층짜리 대피동과 지하 14층 규모의 메인 대피동으로 구성돼 있다. 두 대피동은 지하통로로 연결돼 있으며 총 면적은 4,180㎡에 이른다.
입주자들의 생활공간은 메인 대피동의 지하 4층부터 10층까지 7개층이다. 1개층의 면적은 170㎡로 침실 세 곳, 욕실 두 곳, 부엌, 식당, 거실로 구성돼 있다. 계약자는 200만 달러를 내고 한 층을 모두 사용하거나 100만 달러를 내고 절반만 쓸 수 있다. 거주 가능인원은 전자가 6~10 명, 후자가 3~5명이다.
배부르고 안전한 삶 보장
주지하다시피 서바이벌 콘도의 입주자들에게는 배부르고 등 따신 삶이 보장된다. 지하 2층과 3층에는 앞서 언급한 수경재배시설이 위치, 신선한 농작물과 어류를 공급하며 생활구역 내에는 모든 거주자가 5년간 먹을 수 있는 건조 식품이 밀폐용기 속에 저장돼 있다.
지하에는 대형 물 저장탱크가 고성능 3중 정수시스템을 거쳐 식수를 여과해 제공한다.
또 화생방 방호필터를 채용한 공기정화시스템을 설치, 방사능이나 세균에 의해 실내 공기가 오염되지 않도록 유지시켜준다.
서바이벌 콘도에 들어올 상황이라면 먹고 사는 것에 더해 보안도 철저해야 한다. 자칫 외부인이 내부로 들어오면 방화, 약탈 등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유발될 수 있으며 내부공기와 물이 세균 등에 의해 오염되면서 입주자 전체가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콘도의 주변에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펜스가 설치된다.
펜스 위에는 동작감지 센서와 적외선 카메라를 부착, 하루 24시간 외부인의 접근을 감시한다.
설령 펜스를 통과하더라도 내부 진입은 불가능하다. 1차로 방폭문이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으며 콘도 내부로 내려올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엘리베이터는 오직 입주자들의 지문이 인식됐을 때만 가동된다.
특히 입주자들에게는 원격조종이 가능한 전폭 1.8m의 무인항공기(UAV)도 제공된다. 이 UAV는 한 번 비행으로 주변 160㎞의 정찰이 가능해 언제든 외부 상황을 실시간 파악할 수 있으며 입주자들이 지상으로 나갈 시점을 결정하는 데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덧붙여 지상으로 나갈 때 폭도 등에 대한 방호력을 갖출 수 있도록 별도의 무기고도 마련돼 있다.
현재 홀은 이 시설이 완성된다면 지구 종말 상황에서도 문화적이고 편안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생명 연장의 대가
지하벙커형 거주시설의 최대 한계는 밀폐공간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스트레스다. 자칫 시설 내부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한계
일견 서바이벌 콘도는 언제 문명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환상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시설들의 면면을 뜯어보면 해결해야할 과제들도 상당히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시설 자체가 보유한 방호력과 안전성, 편의성은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점은 시설을 이용하는 인간 자체에 있다. 원래 인간은 폐쇄된 공간에서 생활하기 상당히 어려운 동물이다. 현대의 원자력 잠수함들이 사실상 무제한의 잠수 기간과 항속 거리를 자랑하지만 항해 기간이 70~80일을 넘는 경우가 드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승무원들이 폐쇄공간에서 너무 장기간 갇혀 있다 보면 스트레스 누적에 따른 명령 불복종과 판단력 저하, 구성원 간 물리적 충돌 등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바이벌 콘도는 외부 문명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최대 5년 이상 문화적인 생활을 가능케 해준다는 것이 래리 홀[사진]의 주장이다.
러시아 생물의학문제 연구소에서 지난 1999년 유인화성탐사에 대비, 화성탐사선을 모방한 시뮬레이터에 피실험자들을 가두고 폐쇄실험을 실시했는데 불과 110일만에 참가자들 사이의 폭행과 성추행이 벌어져 실험이 중단된 사례도 있다. 그나마 화성탐사는 약 520일이라는 목표기간이라도 있었지만 서바이벌 콘도는 언제쯤 시설을 나올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1년이 될 수도, 5년이 될 수도, 운이 나쁘면 영원히 나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을 수도 있다. 훈련된 우주비행사조차 쉽지 않은 이런 심리적 압박을 일반인이 과연 버틸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또한 대피시설의 기능이 언제까지 정상적으로 유지될지도 문제다. 시설에 채용된 각종 장비와 기계장치들은 유지관리에 상당히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만큼 고장이 났을 때 적절한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수경재배시설 등 식량공급을 담당하는 설비들이 예상대로 충분한 산출을 해줄지도 미지수다.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과거 '축소된 생태계 재현'을 지향해 1989년에 만들어졌던 '바이오스피어2' 실험의 실패 사례다. 1.25헥타르 면적의 바이오스피어2의 모든 시설은 최대한 현재의 지구와 비슷하게 만들어졌으며, 이 안에 8명의 사람이 들어가 외부와의 물질 교환 없이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 하지만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구조물 자체의 설계상 결함과 흙 속 미생물들의 과도한 산소 소비로 식량생산에 큰 차질이 빚어진 결과였다. 실험 종료 시 피실험자들은 영양실조 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인간의 수명은 70~80세에 이른다. 외부 재난에 대한 보호력이 10년도 되지 않는다면 혹시 밀폐공간에서 남들보다 몇 년 더 사는 것 외에도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최후의 발악으로 두터운 방폭문을 열고 지상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문명의 보호가 사라진 야외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원래 어떤 재난에서도 100% 안전한 대피시설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서바이벌 콘도를 포함한 지하벙커 대피시설이라고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