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INTERVIEW] 최정화 CICI 이사장 인터뷰

"국내외 인적 네트워크 살려 한국 알리기에 기여할 터"

국내 최초 동시통역사인 최정화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는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이다. 그는 한국을 알리기 위해 10년 전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을 만들고 이사장 직함까지 겸하고 있다.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하기 어렵다지만 그는 달랐다. 통역사로 명성을 날렸고 한국 알리기 사업에도 열성을 다하고 있다. 하제헌 기자 azzuru@hk.co.kr 사진 윤관식 newface1003@naver.com

난 1월 15일 서울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CICI코리아 2013’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가수 싸이는 한국 이미지를 높인 공로로 ‘디딤돌상’을 받았다. 디딤돌상은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이 한국 이미지를 세계적으로 높인 명사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그동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 베이징 올림픽 역도 금메달리스트 장미란 씨 등이 이 상을 받았다.

‘CICI코리아 2013’ 행사가 열리기 전인 1월 9일 오후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최정화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CICI 이사장 이전에는 통역사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최 이사장의 개인사를 설명하는 데 꼭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1981년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 최초의 국제회의 통역사가 됐다. 1986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통역 분야의 노벨상인 다니카 셀레스코비치 상을 수상했고, 2003년에는 한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 정상회담 통역만도 12차례 진행했다.

최 이사장은 자타공인 국제회의 전문가다. 국내 최초 동시통역사로 지난 30여 년 동안 중요한 국제회의와 정상회의 통역을 도맡으며 탄탄한 명성을 쌓았다. 그런 그가 10년 전 느닷없이 일을 저질렀다. ‘한국 알리기 전도사’ 역할을 하기 위해 CICI를 만든 것이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CICI를 통해 국내외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한국의 참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최정화 이사장은 말한다. “숫자는 적지만 영향력이 큰 여론 주도층은 일방적으로 정보를 받길 원치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본인이 궁금한 걸 질문할 수 있고 같은 공간에서 소통해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지금 당장 재원도 부족하니까 해외에 나가는 건 차치하고 우선 한국에 있는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려야겠다고요. 그때 생각해 낸 게 ‘코리아 CQ 포럼’이었습니다.”

“‘우선 한국에 있는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만든 것이 ‘코리아 CQ 포럼’입니다.”

‘코리아 CQ 포럼’은 2006년부터 시작했다. 내국인은 물론 각국을 대표하는 주한대사들, 기업 CEO, 변호사, 교수 등으로 구성된 회원들이 매년 두 차례 3개월 과정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CQ는 문화지수(Culture Quotient), 의사소통지수(Communication Quotient), 협력지수(Cooperation Quotient)를 합친 개념으로 최 이사장이 생각해낸 것이다. ‘코리아 CQ 포럼’은 한국의 명소나 산업현장을 찾고, 한식을 만들어보는 등 한국 문화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호응을 얻었다. 한국인의 외국문화 이해와 주한 외국인의 한국문화 이해를 촉진하기 위한 일종의 한국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정·재계, 언론, 문화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강연을 듣고, 주한외국인 대사·글로벌 기업 임원·예술가 등 국내외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한국의 대표 문화 관광지를 방문해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배우는 소통의 장이다. 정기 과정을 수료한 CQ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총동문회를 결성해 정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이 밖에도 CICI는 주요 국가 문화계 리더들을 초청해 실시하는 문화소통포럼CCF(Culture Communication Forum), 한국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국내외 이벤트, 한국 이미지 제고를 위한 설문조사 연구, 한국 소개 책자와 동영상 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일을 겁내지 않는다

CICI 이사장과 한국외대통번역 대학원 교수. 최정화 이사장은 두 가지 직함을 소화하느라 온종일 일을 끼고 산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게 힘들 법도 하지만 그는 좋아서 하는 일이라며 다소 식상한 대답을 내놨다. “네, 정말 바쁜데요. 제가 좋아서 하니까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아침에 제가 보통 5시에 일어나는데, 밤 11시 잘 때까지 한국 알리는 일로 바쁘죠.” 그는 단순히 재미있어서, 좋아서 하기에는 힘겨운 일을 하고 있다. 그런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통역을 오래 하다 보니 상대방의 메시지를 캐치해서 전달하는 게 몸에 배었죠.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달자 입장이 아닌 생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어떤 생각이 들면 바로 실행에 옮겨요. 아침 일찍부터 어떤 일이 떠오르면 그걸 어떻게 실행할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실행 하면 다음에 해야 할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죠.”

최 이사장은 일을 겁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혼자서 그 많은 일을 하기엔 버거워 보인다. 최 이사장의 네트워크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듯싶다. 통역사로서 어떻게 그런 인적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제가 얼굴도 별로고 키도 작지만, 예전에 통역을 도와드렸던 장관님들, 총리님들과 아직까지 연락 주고 받고 식사도 하곤 해요. 그분들이 저를 만나서 항상 하시는 말이 있어요. ‘최 교수를 만나면 즐겁다’는 거죠. 사람을 만났을 땐 서로가 즐거워야 해요. 제가 네트워킹을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닙니다. 제가 즐거웠고 상대방도 즐거워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됐던 거죠. 그러다 보니 몇 십 년이 되도록 알고 지내는 거죠. 그분들은 제가 뭘 하든 도와주고 계시고요. 저는 항상 진심은 통한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만나서 말씀을 드리면 지금까지는 99.9% 동참을 해주세요.”

코리아 CQ 포럼은 올해 2월 말 시작하는 15기를 준비 중이다. 20명이 넘게 등록한 상태다. 비슷한 종류의 모임들이 있지만 1~2년 뒤 없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외국인을 포함한 국내 오피니언 리더들을 한날 한시에 모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 시작은 인맥이 중요했지만 결국 프로그램 내용이 우수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다는 게 최 이사장의 설명이다.

“처음에는 외국인이 3분의 1이고 한국인이 3분의 2였는데, 이제는 외국인이 더 많아져서 동수를 이루고 있어요. 참 재미있는 게 외국인들은 자기들만 모이는걸 원하지 않아요. 본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한국의 여론 주도층들, 예컨대 이윤호 삼성전자 부회장(현 상임고문)이나 마에스트로 정명훈씨와 만나 식사도 하는 걸 참 좋아해요. 프로그램에 만족하신 회원들이 지인들을 데리고 다시 오시기도 합니다.”

최 이사장이 세운 새로운 계획

최 이사장은 올 한 해 더 바쁘게 지낼 듯싶다. 최 이사장은 남편이 세운 회사와 CICI가 함께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고 한다고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총지배인으로 일하다 얼마 전 은퇴한 최 이사장의 프랑스인 남편은 지난해 회사를 하나 차렸다. 지금까지 한국 알리기에 주력해 왔던 최 이사장은 이제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에게 관심을 보이려고 한다. “한국이 지금 해외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외국인들을 한국으로 더 불러 모으는 데 집중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협회를 만들려고 준비 중입니다. 1월 말쯤 발족할 것 같아요. 가칭으론 오사(5.4)협회라고 했어요. 한국을 오감으로 느껴서 ‘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려면 네 가지 거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죠.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화젯거리가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어요. 호텔, 경쟁력 있는 레스토랑, 힐링과 관련된 것 등 한국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협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는 언론에서도 많이 도와줄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아까 얘기 했듯이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 화젯거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화젯거리는 언론에서 만들어줘야 되잖아요. 언론 매체도 함께 오사협회에서 일한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최 이사장은 남편 외모가 경쟁력이 있다고 은근히 자랑하면서 고마움도 표시했다. 최 이사장은 자신이 준비하는 한국 알리기 프로그램에 대해 외국인이 느끼는 피드백을 남편에게 미리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으로서 보는 느낌이 어떤지를 수시로 주고받아요. 하다 못해 저희 행사 때 음식 하나를 준비해도 다 체크해 주죠. 공연 하나를 보더라도 그냥 소문 듣고 선택하지 않아요. 미리 저랑 남편이 가서 봅니다. 그런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CICI가 하는 일이 좀 잘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달라진 한국의 위상

최 이사장은 1986년부터 정상회담 통역을 시작했다. 통역 때문에 방문한 국가가 60곳이 넘는다. 30년 이상 통역을 하면서 우리 나라의 위위상 변화를 몸소 느낀 적이 많았다. 최 이사장은 2000년까지도 한국에 대해 모르는 외국인들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엔 조금씩 변화가 느껴졌다고 한다. “그때 제가 인도네시아에 있는 사원에 갔어요. 새벽에 동이 트는데 어떤 서양인들이 저한테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때 그 쾌감이 너무 좋았어요. 너무 기뻐서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아임 프롬 히딩크스 컨트리 (I’m from Hiddink’s country)라는 거예요. 그때 느낀 게 많았어요. ‘아, 한국을 알려야 되겠다. 한국을 알아주면 이렇게 큰 희열감을 느낄 수 있구나’하고 생각했어요.”

당시 한반도에선 북핵 문제가 터졌다. 최 이사장은 위기가 기회라는 생각을 했다. “단군 이래 한반도에 대해 그렇게 관심 많았던 적은 처음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라’ 하는 생각으로 2003년에 CICI를 발족했죠.”

국제회의에서 어떤 언어에 대해 통역을 준비하는가를 보면 그 나라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최 이사장이 2000년 후반 북대서양 카나리아 제도에 있는 란사로테 섬으로 통역을 하러 갔을 때 일이다. 비행기를 수 차례 갈아타고 도착해 회의장 통역 부스를 보는 순간 최 이사장은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유럽에 언어가 얼마나 많아요? 세상에, 동시 통역 부스를 봤더니 영어, 불어, 한국어 세 개만 있는 거예요. 스페인어 통역이 제공이 안돼서 스페인 장관은 영어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통역부스 안에서 느낀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그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겁니다.”

2005년 CICI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위상 변화가 나타났다. 한국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를 물었는데,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한국전쟁이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분단국이었다. 그리고 2012년 12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드디어 한국의 이미지에 변화가 생겼다. 최 이사장은 말한다. “삼성, 현대, LG 같은 대기업이 답으로 나왔어요. 이미지가 변해가고 있던 거죠. 2012년 한국을 가장 각인시킨 게 뭐냐는 질문에는 72%가 ‘싸이’라고 대답했어요. 한국 문화의 경쟁력이 이제 외국인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거죠. 한국 이미지 알리기에 힘써온 저로서도 기뻤습니다.”

미테랑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

최 이시장은 1986년부터 한불 정상회담 때 프랑스 측 통역을 맡았다. 어떻게 프랑스에서 최 이사장에게 통역을 맡길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겸손해 했다. “그때 제가 프랑스통역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어요. 그런데 프랑스인 한국어 국제통역사가 없었습니다. 제게 운이 있었던 거죠. 제가 통역사가 됐어도 양국 정상이 만나지 않았으면 통역할 기회가 없었을 텐데, 때마침 1986년은 한-불 수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어요. 그 기념으로 100년 만에 양국 정상이처음으로 만난 거죠. 억세게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멀쩡하게 통역을 했나봐요. 그 후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대통령과 프랑스 대통령들 간 통역을 맡았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 시장 때 통역을 했었지요.”

오랜 기간 통역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명사들도 많을 법하다. 최 이사장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을 꼽았다. 미테랑 대통령은 최 이사장이 가장 친숙하게 여기는 대통령이다. “한국에서 대전 엑스포가 열렸는데 그때 방한하셨어요. 서울에서 대전까지 헬기로 25분 만에 가는데 이륙하자마자 책을 읽기 시작하더라고요. 비서실장이 다 떨어진 가방에서 꺼내준 책을 받아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해요.” 최 이사장은 미테랑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풀어내는 지식은 세기의 석학이라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고 감탄했다. 정상 간 식사 자리에서 미테랑 대통령이 쏟아내는 역사와 철학 이야기를 옮기는 통역도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 통역을 하면서 최 이사장은 남을 배려하는 게 얼마나 큰 미덕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파리 통역대학원생 신분으로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프랑스 지방 도시로 갔을 때 일이다. 비가 내려 땅이 젖어 있는데도 외국인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추기경 반지에 입을 맞췄

“한국으로 외국인들을 더 불러 모으는 데 집중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협회를 만들려고 준비 중입니다. 1월 말쯤 발족할 것 같아요.”

다. “가서 보니까 제가 있을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불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시는 거예요. 그런데도 제 입장을 생각해서 프랑스 사람이 말을 걸면 ‘최 양~’ 하시면서 제게 통역을 부탁하시더군요. 그때 배웠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최 이사장은 추기경과 닷새를 함께 다녔다. 추기경이 5일 동안 검은 옷을 입는 걸 보고 최 이사장이 물었다. “‘매일 그렇게 시커먼 옷만 입고 있으면 지겹지 않나요?’ 추기경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최 양이 아직 한 번도 명동 성당에 안 와본 것 같네요. 한번 가톨릭 신자 돼봐요. 그때 만나러 오면 내가 빨간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는 그 뜻을 몰랐어요. 당신이 추기경이기 때문에 붉은 색 옷을 입는다는 게 아니라, ‘나는 최 양의 믿음을 축하하기 위해서 빨간 옷을 입고 최 양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너무나 표현이 예쁘잖아요. 그 말은 제가 못 잊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통역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국내에도 통역사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다. 과거 한국외대에만 있던 통역대학원도 2000년 이후 몇 군데 다른 대학에 설립됐다. 통역사나 해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난 지금, 예전에 비해 통역사의 위상이 추락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통역을 전공한 뒤 통역사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걷는 사람도 많다. 통역사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들려줄 충고는 없을까? 최 이사장에게 물었다. “저는 본인이 가장 원하는 걸 하라고 말해요. 제자 중에는 2~3년 프리랜서 하다가 취직하는 경우도 있고 20년째 통역 프리랜서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자기한테 맞는 걸 선택하면 행복할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한 게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걸 원하는 사람들은 99% 전직을 하더라고요.”

최 이사장은 통역대학원에서 2년 동안 배운 효율적인 의사소통 능력이 인생을 최정점으로 끌어 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도 많고, 그래서 예전보단 통역사 수요도 적어졌지만 통역이라는 학문이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여기고 있다. 통번역대학원 경쟁률이 요즘도 10대 1에서 15대 1까지 된다는 게 최 이사장의 설명이다. “효율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갈고닦을 수 있는데, 2년 정도 투자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외부 강연 나가면 통번역 공부를 해보라고 권해요. 궁극적인 목적이 통번역사가 아니더라도 상대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요지를 파악해서 외국어로 전달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무기거든요. 그래서 저는 항상 제자들한테 말해요. 30~40년 동안 통역을 해도 좋고, 아니면 언어를 무기로 국제 변호사나 국제 기구 공무원이 돼도 좋다고요.”

국내 통번역대학원 졸업자 중 상당수가 개인사업자로 일하고 있다. 프리랜서도 결국 영업력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최 이사장은 이렇게 답했다. “남학생들은 대부분 입학 초기에는 프리랜서 한다고 해요. 그래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어느 장인 장모가 프리랜서 아들한테 자기 딸 주겠냐고 얘기도 하죠. 졸업반이 되면 전부 다 취직하겠다고 해요. 그런데 과거에 비해 인하우스(회사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로 일하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프리랜서를 하려면 일단 상대방과의 친화력이 좋아야 해요. 모든 게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능력 하나만 가지고는 안되죠. 자기 나름대로 고객 관리도 해야 되고, 네트워킹도 해야 합니다.”

최 이사장이 생각하는 통역사의 매력은 무엇일까? “인간 활동과 관련된 모든 일을 알 수 있어요. 하루는 국방부에서 미사일 제작에 대해 통역하고, 다른 날은 비행기 타고 파리에 가서 제빵 제과 통역을 해요. 또 엘리제궁에 들어가서 정상들 간 통역을 하기도 하죠. 내가 주역은 아니지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역사적인 순간에 참여할 수 있는 게 특권이죠. 인간은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보단 다양한 환경에 놓이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그런 게 굉장히 큰 매력 중 하나인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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